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

조회수 2016. 03. 03. 15: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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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자 홍윤신씨의 쓴소리
1945년 3월, 일본 오키나와 미야코 섬 주민 329명이 집단자결했다.
일본군에 의해 ‘옥쇄’와 ‘집단자결’을 강요당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미군 포로가 되면 강간당하고 고문당하는 끔찍한 삶을 살아야 한다’

‘포로가 돼 일본군의 기밀을 누설하면 안 되니 죽어야 한다’


일본군이 공포와 협박을 주입한 결과였다. 종전을 한 달 앞두고 섬 주민들은 서로를 죽이고 자신을 죽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

홍윤신(38) 일본 와세다대학 국제언어문화연구소 초빙교수는 2002년 ‘오키나와’를 테마로 공부하기 위해 와세다대학 아시아평화연구소로 유학했다. 
출처: 한겨레21
전후 미군이 설치한 이시가와 수용소에 수용된 오키나와 주민.
그녀가 보기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독립된 류큐 왕국이었던 오키나와는 메이지시대 사쓰마번주에게 정복당하면서 일본령에 속하게 된다. 오키나와어를 쓰지 못하는 등 차별적 정책을 통해 지배받았다. 
출처: 김도형 기자
긴조 미노루: <전쟁과 인간> 中 집단자살 장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전역에서 가장 격렬한 지상전이 펼쳐진 곳도 오키나와다. 오키나와 주민의 희생을 일본군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전쟁 기간 중에 오키나와어를 쓰는 주민은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기도 했고, ‘집단자결’에 내몰리기도 했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렴.”

2004년, 홍윤신은 도카시키섬으로 간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처: 한겨레21
홍윤신 교수가 미야코섬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그 무간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당시 6살요시카와였다. 그녀는 해가 저물고 밤이 되어서야 찬찬히 ‘집단자결의 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도 말했다. 폭격으로 숨진 ‘하루에’라는 이름의 조선인 위안부였다. 그의 어머니는 하루에의 주검을 거두며 기도문을 읊었다. 
“전쟁이니 너무 서러워하지 마.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렴.”
이혜미씨 작품
2006년 어느 봄날, 미야코섬에 도착해 길을 가다가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83)를 만났다. 그는 <아리랑>도 기억하고 있었다. 
김정애씨 작품
“의미는 몰랐지만 우리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어. 군기제인가, 육군기념일에 전통극을 했는데 거기서 위안부들이 <아리랑>을 불렀으니까.무척 아름다운 음이어서 나도 기억해.”
당시 13살 소년이 기억한 것은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영화 <귀향> 화면 갈무리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건 우물 주변에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이렇게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는, 치마 밑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서 말이죠. 멍하게….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니까, 그냥 멍하니….”

위안부 여성, 군과 함께 사망했을 것

1992년 오키나와 지방사 연구자들이 밝힌 오키나와 제도의 군위안소는 130곳이었다. 그중 49곳의 위안소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본다. 다만 그 규모는 정확하지 않아, 700명이라거나 1500명이라는 등 추정치의 편차가 크다.
출처: 한겨레
일본군 위안소 자리. 지붕이 빨간 기와로 되어 있어서 ‘빨간기와집’으로 불렸다.
 2002년 국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실태조사에 나선 한국정신대연구소는 적어도 700명 이상이 오키나와섬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출처: 가와다 후미코 제공
오키나와 도카시키섬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배봉기 할머니.
이 가운데 몇 명이나 한국으로 귀향했을까. 지상전이 가장 극심했던 오키나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여성들의 상당수는 흔적도, 기억도, 기록도 없이 오키나와 50개 섬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유일한 생존자, 추모비 제막식 앞두고

2007년 확인 당시 박재남 할머니가 유일하게 생존해 있었다. 박 할머니는 미야코섬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생활, 돌아올 때의 상황 등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았다.
“돌아올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전혀 없다. 다만 죽을힘으로 저항했다”
출처: 가와다 후미코 제공
미야코섬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가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돌을 가리키고 있다. 이 돌이 2008년 ‘아리랑비’가 됐다.
윤정옥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미야코섬에 ‘위안부를 위한 추모비’를 세우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 추모비 제막식 꼭 한 달 전인 2008년 8월5일 돌아가셨다. 박재남 할머니는 지인 편에 ‘미야코비 건립 기부금’ 5만원을 남겼다.

“한·일 지식인, 자기반성 필요하다”

일본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홍 교수는 외롭다. 일본 젠더학회에서 ‘조선’과 관련한 공부를 하는 학자는 7명 안팎이다.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수많은 성명서를 낸 일본 학자들 가운데서도 학문 영역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출처: 가와다 후미코 제공
박순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일본에서 증언하고 있다. 맨 왼쪽이 홍윤신 교수
“지식인들이 성명서를 내는 편안한 위치에서만 발언하는 게 아닌지 자성했으면 좋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실증적으로 파헤쳐온 홍 교수가 두 나라 학계에 던지는 쓴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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