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이론과 인생

조회수 2017. 7. 13. 16:5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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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달리 말하면 인생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후회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인생에 많은 사람이 가지는 태도 한 가지는 그것을 선물 상자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당신은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 상자 앞에 서 있다.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채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열기 전에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일까 예측할 것이다. 그 상자가 열렸을 때 기대보다 좋지 않으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이 기대하고 후회한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뭔가 기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능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육면체 주사위를 생각해 보자. 당신은 그 주사위의 눈금이 1에서 6까지 있다는 것을 안다. 높은 숫자를 겨루는 게임에서 1이 나오면 실망하고 6이 나오면 기뻐하지만 -3이나 0.5 혹은 10을 그 결과로 예측하지는 않는다. 


만약 뭔가의 이유로 그 주사위를 평범한 육면체 주사위가 아닌 1부터 20 중 하나의 숫자가 나오는 20면체 주사위로 착각했다고 하자. 당신은 6이라는 숫자에 실망하겠지만 실은 육면체 주사위였으니 아주 운이 좋았던 것이다. 우리는 과연 가능한 결과가 어떤 것들이었는지 어떻게 알까. 생각해보았는가?


물론 인생은 주사위보다 복잡하다. 어떤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작은 확률일 때도 있다. 로또 당첨으로 재벌이 된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내가 로또에 당첨되지 않은 것에 실망한다는 식이라면 인생에 대한 실망은 아주 높은 확률로 정해진 운명이 될 것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뭐가 가능한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인생이라는 선물 상자 안에 든 것은 유령 같은 것이다. 같은 인생인데도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뿐 아니라 심지어 죽어서 인생이 끝나는 순간에도 그 안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자신이 수천 년 뒤에도 세계에 이름을 남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도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뭐가 가능한지,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하물며 그 여러 가지 가능한 것들의 확률이 어떤가 추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기대가 망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당신은 애초에 무엇을 왜 기대했는가?

당신의 주사위가 어떤 모양인지 알고 있는가?

인생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순수하게 믿는다면 인생에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뭐가 가능한지 전혀 모르는데 왜 실망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꽤 오랜동안 살아왔고 오늘도 몸 상태가 죽을 것 같지는 않으므로 내일도 살아있을 것이다’라고 기대한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평하게 말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인생에 실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오만일 것이다.


확률이론(probability theory)에서는 ‘아무런 추가 증거 없이 무엇이 얼마나 가능한가’ 하는 기대를 ‘프라이어(prior)’라고 부른다. 우리가 가지는 인생의 프라이어는 대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한 직접 체험과 책이나 영화로 접한 간접 체험으로 얻은 정보에 근거해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무의식적으로 ‘나는 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생활 수준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내가 한국 사람이니 나는 한국 사람들의 통상적인 생활 수준 정도는 달성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런 기대도 그렇게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실제 프라이어의 결정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10-20년간 계속 땅값이 매년 20%씩 오른 나라에서는 땅값이 오른다는 미래가 당연해보일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해서 많은 한국인은 오랫동안 자신이 부모보다 더 잘 사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느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종종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 중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대학을 나온 베이비붐 세대들은 자신들은 부모들보다 더 멋진 삶을 누릴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 세대와 조부모 세대에게서 틀에 박힌 이야기를 듣는다. 여고생인 손녀는 외국으로 수학여행을 가는데 그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는 외식도 드물었다고 말하고, 그 옆에 있던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는 밥 굶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고성장 시대가 끝나가는 한국에서 젊은 세대는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그들은 그 부모들부터 사교육비만 수천만 원씩 썼는데 내 자식이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실망 어린 눈총을 받기 쉽다. 펼쳐지는 그들의 인생은 부모의 기대보다, 그 자신의 기대보다도 못하기 쉽다.


미디어의 영향도 매우 크다. SNS를 하는 사람들은 우울해지기 쉽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에 자신의 행복을 선전하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나는 평균도 되지 않나 보다 싶어서 우울해진다는 것이다. 이것도 인생에 가지는 프라이어가 사회적 선전에 의해서 바뀐 결과다.


이런 외적이고 거시적인 영향 말고 더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영향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기대는 세상의 현실 이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의존한다. 자기 집을 가지는 것이 꿈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집을 사는 데 실패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밖에 안 되는 스스로의 능력과 운에 대해 실망할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왜 집에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알고 보면 어릴 적 친구나 부모가 가볍게 던진 한마디 말에 집착하면서 생긴 꿈일 수도 있다. 세입자를 차별하고 비하하는 말을 어릴 적에 들었던 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거나 혹은 지기 싫은 누군가에게 진 것 같던 기억이 큰 상처가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집을 가지는 것이 평생의 꿈이 되고 성공한 삶의 기준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멋대로 생겨난 자기 인생의 기대치를 스스로 점검해 보는 일 없이 인생을 속단하고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을 수 있다. 우리의 기억은 쉽게 변질되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어떤 것을 특정한 계기로 해서 좋아하게 되고서는 자신이 그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믿는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의 프라이어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에 기반 둔 예측과 현실이 다르면 실망하곤 한다. 인생이 기대와 달라서 실망했다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우리가 뭘 어떻게 왜 기대하는가 최소한의 고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시험지에 아무 답이나 써넣고 왜 성적이 나쁜가 하고 실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생에 대한 기대는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넓게 보는가에 의해, 우리가 어떤 꿈을 꾸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컵 속의 물이 온 세상인 줄 아는 사람은 그 컵 속의 인생밖에는 보지 못한다. 바다를 헤엄치는 것을 꿈꾸는 사람은 그 컵 속 어디에 자기가 있는가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꿈을 꾸는 방식에도 종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자주 꾼다. 우리는 그런 기대를 품고 인생의 문을 연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꿈은 적어도 성인이나 나이가 성인에 가까워진 사람이라면 권할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꿈을, 인생에 대한 기대를, 자신의 프라이어를 보다 적합한 형태로 수정해야만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꿈으로서의 누군가란 실제 피와 살과 뼈로 이뤄진 실체가 아니라 어떤 관념으로서의 누군가라는 것이다. 관념의 추구를 꿈으로 삼은 것이다. 유명인을 보고 다른 젊은이는 자신도 저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질 수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유명 배우를 좋아하고 동경하는 골수팬의 마음과 비슷하다. 즉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실제의 인간이 아니라 대개 이상화·미화된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관념이다.


이 점을 깨닫고 우리의 꿈을 그보다 더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관념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사람의 이름을 가진 관념은 대개 너무 복잡하다. 누군가에 관해서 평생을 연구해도 그 사람을 다 알지 못한다. 알 수 없는 관념을 꿈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알 수 없는 목표를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고 꿈을 달성하는 데 문제가 있다.

달리 말해 과학자를 꿈꾼다면 뉴튼,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과학자가 되려는 꿈을 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이젠베르크나 과학자는 인간이나 직업이 아니라 그런 이름을 가진 관념들이다. 다만 과학자는 보편적인 관념이라서 내가 그 뜻을 이해하고 수정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만약 하이젠베르크나 마이클 잭슨이 되겠다고 한다면 되기도 어렵지만 기적적으로 성공한다고 해도 무의미한 행동에 집착하기 쉽다.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일이고 이런 식으로 꿈꾸는 것은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기 쉽게 만든다.


‘이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꿀 때 그 ‘이렇게’가 뭔지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타인이 될 수도 없고 된다고 해도 행복할 리 없다. ‘송중기 같은 연예인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대개는 실제의 송중기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연애소설을 재현하려고 하는 사람은 현실의 연애는 소설과는 달리 수없이 많은 고통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름을 가진 관념을 추구하는 꿈은 되지도 않지만 달성해도 행복하기 어렵다.


반면 보편적 관념을 추구하는 꿈을 꾸거나 아예 조금씩 자기의 이름을 가진 꿈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나름의 보람을 찾기 쉬울 것이다. 능력이 부족하고 운이 없어도 우리 자신이 될 수는 있다. 자기의 이름을 가진 관념을 꿈으로 삼아서 자기를 완성해 가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오직 그것만을 기대한다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도 “내 인생은 기대에 어긋났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일은 피하기 쉬울 것이다.


현대 사회의 엄청난 불확실성을 고려한다면 농경사회에서나 가능했던 “나는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식의 꿈은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을 기대하고 그럴 수 없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확률이론을 배워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일정한 가치가 있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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