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오늘, 독일 41년 만에 재통일 이뤄내다

조회수 2018. 10. 3. 11: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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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 1990년 독일 통일 당시의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시민들이 독일기를 휘날리면서 운집해 있다.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재통일 이뤄내다

1990년 10월 3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각 주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졌다.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동서독)+4(미·영·프·소) 외무장관 회의에서 최종규정 조약이 조인된 데 이어 마침내 10월 3일 하나의 독일이 탄생했다. 


그것은 독일군의 항복으로 제3제국이 소멸하고 4개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점령지역 통치를 분담하게 된 뒤 1949년 독일이 서부의 독일연방공화국과 동부의 독일민주공화국으로 분단된 지 41년 만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한 뒤 독일은 4개의 점령지역으로 나뉘었다. 이처럼 연합국이 독일을 분할한 원래 목적은 독일이 다시 결합해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포츠담회의는 독일을 분할하지 않고 어떤 형태의 중앙기구를 갖는 단일 경제단위로 취급한다는 원칙을 선언했다. 1946년 영국과 미국의 점령지역이 경제적으로 통합되자 소련과 프랑스가 이에 반발했으나 1948년에는 서방 3개국 관할 지역에 통화개혁이 단행돼 단일경제체제가 구축됐다.

▲ 얄타회담의 연합국 수뇌들. 왼쪽부터 처칠(영국), 루즈벨트(미국), 스탈린(소련)
▲ 독일의 분할. 2차대전 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국이 점령했다.

1949년 5월 23일 단일경제체제가 형성된 서부 지역에 헌법을 대신할 기본법이 공표됨으로써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연방의회는 기독교민주당의 아데나워를 초대 연방 총리로 선출했다. 서독은 기본법에서 중앙집권 대신에 연방주의와 대통령 간접선거를 선택했고 이러한 안정 기조는 정치 발전으로 이어졌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독일민주공화국으로 분단

서방 지향적 외교 관계를 추구한 연방공화국은 1955년에는 유럽 공동체(EC)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그러나 동독과 국교를 수립한 동유럽 국가(소련을 제외하고)는 승인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할슈타인은 당시 독일 외무차관의 이름이었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정치·사회·경제는 연방공화국과는 다르게 전개됐다. 독일 공산당은 소련 점령기에 이미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구축해 농지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민간소유의 산업기반을 박탈했다. 동독 공산정권은 1949년 10월 인민의회에서 ‘독일민주공화국’ 헌법이 발효됨으로써 공식 수립됐으며 공산당 중심으로 개편된 ‘사회주의통일당’의 정치국이 최고 권력기관이 됐다.  


동독의 경제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 구성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가입함으로써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에 종속됐다. 농업 집단화가 추진되고 노동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노르마(할당된 노동의 기준량과 책임량) 향상이 강요됨으로써 농민과 노동자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독의 시민들이 장벽 너머 동독 경비병을 지켜보고 있다.
▲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서방측 선동을 차단한다는 구실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구축됐다.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의 수가 해마다 늘어난 이유다. 1953년 6월에는 폭동사태까지 초래돼 소련군이 출동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이러한 불안상태가 계속되자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서방측 선동을 차단한다는 구실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구축됐다. 독일민주공화국 정부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을 금했으며 자유를 찾아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고 하는 동독 탈출자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했다. 

고착되는 것처럼 보였던 분단 상황은 1969년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1913~1992)가 연방공화국의 총리로 취임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브란트는 동유럽 국가와의 수교를 지향, 할슈타인 원칙을 청산하고 동독을 승인함으로써 ‘1민족 2국가’ 원칙을 추구했다. 중앙 유럽의 공산 국가들과 화해를 시도하는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은 마침내 1974년 동서독의 국교 정상화로 이어졌다.


베를린 장벽 구축 이후 서독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해 생산량이 유럽 공동체 전체의 27%를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대외무역량도 미국·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동독도 계획경제의 테두리 안에서도 ‘신경제체제’를 모색하면서 사회주의권 내에서 꾸준한 경제 발전을 이뤘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통일’의 밑돌을 놓다

1982년 말 서독에서는 기독교민주당의 헬무트 콜(1930~2017)이 총리로 선출되면서 사회민주당의 오랜 집권이 끝났다. 그러나 서독의 정치풍토는 제2차대전 이래의 전쟁책임론과 역사발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해방돼 독일 역사발전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는 쪽으로 쇄신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논의의 배경에는 서독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결국은 독일의 재통일을 실현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한편, 1980년대 들면서 동유럽 사회주의권에도 민주화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제창해 스탈린주의 노선을 청산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에 착수했다.  


민주화 경향에 예민하게 대처하던 동독은 ‘동독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강한 제재를 가했다. 다른 공산국가보다는 나은 형편이었지만 동독 경제는 서독의 생활 수준이나 구매력에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선거에서 지지율 하락으로 드러난 인민들의 불만에 공산당은 개표를 조작했다. 그러나 이미 분출하기 시작한 인민의 불만을 달랠 방법은 달리 없었다. 1989년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쪽 국경선을 개방하자 엄청난 출국 러시가 빚어졌다.  


동독인들은 부다페스트의 서독대사관과 동베를린의 서독 연락사무소에 몰려와 서독으로 망명을 요청했다. 9월에는 반체제 인사들이 동독 최대의 재야단체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을 조직하고 30만이 참여한 라이프치히(10월)를 비롯해 각 도시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10월에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축출됐고 민중의 힘은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고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배체제도 무너졌다. 공백기의 정치질서는 다양한 정파가 마주 앉은 이른바 ‘원탁회의’에 의해 유지됐다.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

1990년 3월 10일 실시된 동독 최초의 자유 선거에서 조기 통일을 주장하는 기독교민주당이 압승했다. 곧이어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23조(동독은 서독 기본법 효력 범위에 편입됨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규정)에 의거,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에 흡수 통합되는 기본절차가 갖춰졌다. 


4월 23일에는 동독에 비공산 연립내각이 수립돼 개헌의 조건을 갖췄다. 5월 18일 본에서 국가조약(화폐·경제·사회 동맹을 창설하는 조약)이 조인되고 양 독일의 경제·사회 통합이 결정됐다. 7월 1일부터 경제 통일이 시행돼 서독의 ‘마르크’로 화폐가 통일돼 동독 화폐가 폐지되고 동독 화폐와 서독 화폐가 새로운 화폐로 교환됐다. 


같은 해 7월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통일 자체를 반대하진 않았지만, 동독이 NATO에 흡수되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그러나 통일 독일이 NATO에서 탈퇴하진 않되 동독 지역에 NATO 군이 주둔하진 않는 것을 전제로 합의되면서 독일 통일을 가로막는 국제적 장애는 사라지게 됐다. 


8월 23일 동독 의회는 10월 3일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흡수통일(로타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의 제안)에 동의했다. 8월 31일 양쪽 독일의 대표는 ‘통일 조약’에 조인했다.

▲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이를 반기는 독일시민들
▲ 1990년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에 시민들이 올라가 있다.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4 외무장관 회의에서 최종규정 조약(독일 관련 최종처리에 관한 조약)이 조인됐다. 이 조약은 통일 독일의 국경, 독일의 무력발사용 선언, 독일 군사력 제한, 소련군 철수문제 등에 대해 최종 합의하고 전승 4대국의 권리와 책임을 종료했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마침내 독일의 통일이 이뤄졌다. 분단 41년 만의 이 통일을 ‘재통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1871년 독일 제국의 성립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독일 통일에서 한반도는 무엇을 배울까

독일의 통일은 독일 경제에 큰 짐을 지워 경제 발전을 장애가 됐다. 통일비용의 재원은 독일 통일 기금과 독일 연대 협약을 통해 이뤄졌다. 통일에 들어간 비용은 1조 5,000억 유로(1,800조 원)로 추산된다. 통일비용이 상승한 주요 원인은 동독 경제가 서독에 비겨 취약했으며 동서독의 마르크 사이의 환율이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동독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독일 경제는 통일 이후 2000년대 초반 실업률 상승, 재정 여력 약화 등으로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면서 통일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됐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경제 개혁과 구동독 지역 개발을 바탕으로 통일경제의 강점을 재부각하고 국가 경쟁력도 상승하면서 독일은 주요 벤치마킹 국가로도 발돋움했다.  


독일은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로 통일을 이뤄내 종종 한반도 통일의 모델로도 거론된다. 특히 독일 모델은 ‘북한 붕괴론’이라는 환상을 심어줬지만, 이는 보수세력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2018년 현재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등 북핵을 해결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긴 여정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과정이 당장에 통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일정한 성과를 내면서 남북의 공동번영으로 이어진다면 통일은 그다음의 문제로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논의는 그런 점에서 희망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참고자료>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위키백과 

- 이해정·조호정, 독일 통일 25주년의 경제적 성과와 한계, 통일경제(2015. 제2호) 

- 백기철, ‘독일 통일 모델’은 없다, 한겨레(2018.09.13.)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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