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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가 더 기생충 같은지 경쟁했다

조회수 2019. 6. 18. 12: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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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충 때문에 참 골치 아프죠?"
출처: ⓒ연합뉴스
“여름에 화장실, 주방 부엌에 기생하는 해충 때문에 참 골치 아프죠? 한 번씩 싸-악 뿌려주면 개미, 날파리, 바퀴벌레, 진드기까지 싸-악 다 박멸시켜주는 해충퇴치젤을 삼천 원. 삼천 원에 드립니다.”

2호선 지하철에 카트를 밀고 나타난 아저씨는 노란 색지에 빨강 매직으로 해충 퇴치라고 손수 적어 만든 카드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아저씨는 침을 튀겨가며 상품을 자랑하고 있었다. 집구석에 숨어사는 바퀴벌레도 완전 박멸할 수 있다고. 치약처럼 짜서 발라두기만 하면 모든 해충이 사라진다고 한창 열변을 토하고 계셨다.

“기생충 봤어?”

친구가 입을 열었다.


최고의 영화였다는 친구의 극찬에 곧 다른 친구가 반박했다. 봉준호 감독이 중산층 남자여서 가난한 사람의 삶도 모르고 만든 거야. 가난한 가족은 영화처럼 서로 챙기며 올라가려고 하지 않아. 맨날 죽일 듯이 싸우기만 하지. 가난이란 그런 거야.


우리의 대화 주제는 반지하 생활 경험으로 옮겨갔다. 반지하에선 바퀴벌레가 방을 사사삭 다니는 소리를 ASMR처럼 들으며 잤었다고. 화장실에서 창문 열면 밖에서 안이 보여서 문 닫고 씻느라 곰팡이가 피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고. 여름에 비가 와서 창문 틈으로 비가 쏟아지면 죽은 쥐며느리가 바닥에 떠다녔다고.

출처: ⓒCJ엔터테인먼트

지하철은 지하에서 지하로 수평 이동을 하고 있었다. 해충퇴치약을 홍보하던 아저씨는 하나도 팔지 못한 채 다음 칸으로 건너갔다. 우리는 누가 더 기생충 같은지를 두고 서로 다퉜다. 한 친구는 대학 중퇴하고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가서 시험을 치는데 5년째 부모님 용돈만 타고 있다고 했고, 다른 친구는 4년제 대학 나와서 제빵학원에 들어갔는데 전공도 못 살리면서 학자금 빚만 잔뜩 쌓여있는 자기가 더 비참하다고 했다. 그 둘에 비하면 나는 고통이랄 게 없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화의 앵글은 침수가 일어나는 지하에 머물기도 했고 스프링쿨러가 물을 뿌리는 지상에 머물기도 했다. 오르막이 있어서 비탈길과 벽이 더 차갑고 극적이었다면 우리 방식의 비참함 겨루기는 차갑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았다. 


지하철에 추락이란 게 없듯이 긴장감이 있을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야말로 실패하지 않는 안전장치이자 동시에 비참함이다. 친구들은 유튜브를 보면서 불X볶음면과 치X볶이면을 섞어먹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했고 주말에 PC방에 가서 이천 원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와 비교하고 경쟁하던 습성은 남아서 지하에 남아 ‘소확행’을 누리는 사람끼리도 경쟁을 한다. 경쟁의 종목을 바꾼 채로. 누가 더 비참한가. 나보다 더 비참해보지 않았으면 말도 꺼내지마. 수능 등급처럼 무기력에도 차별화를 하고 희망 없음에도 등급을 매긴다. 위로를 원하는 건지 그나마의 작은 승리감으로 경쟁에서의 탈락을 보상받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출처: ⓒCJ엔터테인먼트

하지만 고통의 영역에서조차 경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더 없이 비참한 상태가 아닌가. 왜 우리는 매번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선을 긋게 되는 걸까.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현실과 고통 받는 우리 사이에 전선을 그을 수는 없는 걸까?

“안내드립니다. 저희 열차 안에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이 들어와있습니다. 열차 내 판매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물건을 판매하고 계시는 상인은 이번 역에서 하차해주시기 바랍니다.”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마 상품을 한 개도 팔지 못해 다음 칸으로 건너가셨던 그 해충 퇴치 아저씨를 누군가가 신고한 것 같다.


바퀴벌레처럼 쫓겨난 아저씨를 뒤로 하고 지하철은 수평 이동을 계속했다.

출처: ⓒ오마이뉴스

* 외부 필진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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