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간호사'라서 겪은 지긋지긋한 성희롱 이야기입니다

조회수 2019. 11. 11. 00: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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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함을 넘어선 지겨움

저는 89년생 여자입니다. 수술실에서 5년을 일한 간호사이기도 하고요. 진료나 검사 때문에 종종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저와 제가 아는 여성들이 간호사로서, 그리고 환자로서 겪은 지긋지긋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병원은 성추행이 일어나기 좋은 최적의 장소입니다. 커다란 건물 안에 작은 방들이 가득하지요. 진료실, 검사실, 병실 등 밀폐된 공간이 많습니다. 특히 진료실은 의사와 환자가 단둘이 있는 공간입니다. 


저는 간호사로 일하기 전에 유방갑상선외과 진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의사는 30대 남자였습니다. 간단히 문진을 하고 침대에 누워 초음파를 보는데, 기분이 묘했습니다. 초음파 모니터를 바라보는 저와는 달리, 의사는 제 가슴을 보며 초음파로 유두 부위를 문질렀습니다. 당황한 제가 "어떤가요?" 묻자,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며 황급히 진료를 끝냈습니다.

출처: ⓒSBS뉴스

어떤 간호사 동생은 병동에서 일했는데, 허벅지 뒤쪽에 멍울이 생기더니 점점 아파졌습니다. 그래서 근무 중에 친해진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부탁했습니다.


출근 전에 들러서 침대 위에 엎드렸는데,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까지 무차별적으로 촉진을 하더랍니다. 동생은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 굳어버렸고, 그 의사가 자신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만지며 소견을 말하는 동안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습니다. 혼자 욕지거리를 하며 그 의사를 슬슬 피해 다닐 뿐이었죠. 그녀는 동료들과 수군대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는 언니는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내원했습니다. 의사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의사는 언니를 앉혀놓고 가슴을 촉진하고, 눕혀놓고 아래를 촉진했습니다. 언니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항의했는데, 할아버지는 이렇게 해야 알 수 있다며 가슴을 계속 만지더랍니다. 경악한 언니는 서둘러 진료실을 나왔고, 엄마나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며 분해서 울었습니다. 

출처: ⓒJTBC

또 다른 지인 역시 부인과 진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40대 초반이었는데 자궁경부 검사를 위해서였습니다. 다리를 벌리고 침대에 누웠는데, 의사가 자꾸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을 하더랍니다.


또래로 보이는 그 의사는 검사가 끝나자 이번엔 엉덩이 쪽을 훑으며 "이쪽은 불편하지 않으시고요?" 물었습니다. 그 지인은 간신히 화를 참으며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하소연했지요.


성추행은 일방적인 접촉으로 상대에게 굴욕감을 줍니다. 병원은 의료 행위를 빌미로 아주 자연스럽게 성추행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가장 좋은 예방법은 해당 부서의 간호사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두 번째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겁니다. 왜 성추행을 한 사람이 아니라 당한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할까요? 순간적으로 드는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분출해도 됩니다. 반말해도 되고, 욕해도 됩니다.

"기분 더럽네"

"똑바로 안 할래?"

"뭘 그렇게 만져요?"

"거길 꼭 만져야 돼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야 이 &@#*$(!(삐------)"

"뭐 이딴 인간이 다 있어?"

"경찰 부른다?"

전문가라는 낯선 남성 앞에서 '내가 예민한 건가?' 또는 '원래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쾌하다면 본인의 느낌이 맞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아무 말이나 외치세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때 그 순간 표현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분합니다.


의사의 인성에 달린 일이긴 하지만, 지금껏 아무 일도 없었기에 계속할 수 있는 겁니다. 모두가 뒤에서만 삭힐 뿐 즉각적인 응징은 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예전에 다니던 모 병원의 의사가 저의 지인을 (저의 지인인 줄 꿈에도 몰랐겠지만) 성추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 선생님은 평판도 괜찮고, 같이 일하며 제가 인간적으로 좋아했기에 더 안타까웠지요. 실력 있고 젠틀한 분이라고 추천했던 저는 좌절했습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괴로워하던 저는 밤늦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XXX 간호사입니다. 고민 끝에 연락드립니다.

아시다시피 병원은 직원의 소개로 찾아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제 지인이 선생님께 진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불필요한 신체 접촉이 있었고 그 소문이 여러 다리를 거쳐 사직한 제 귀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렸으리라 짐작됩니다. 요즘 시대가 전과는 달라 오해를 사기 쉬우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외람된 줄은 알지만 염려가 되어 어렵게 문자합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한순간의 실수였든 습관적인 행동이었든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만약 오해였다면 조심하면 되고, 성추행이었다면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겁니다. 어떤 환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만둔 간호사의 지인이었다...? 자신의 행동거지를 돌아보며 식은땀을 흘렸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모든 환자가 '누군가의 지인'으로 보이겠지요. 어려운 내용 알려줘 고맙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출처: ⓒMBC

아무리 뉴스나 신문에서 떠들어도 내가 실제로 겪기 전에는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저도 그랬지요. 집이나 학교에서 실질적인 성교육을 받지 못했고, 성희롱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동떨어진 일이라 여겼지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요? 병원밥 5년 만에, 저는 성희롱에 도가 텄습니다.


물론 훌륭한 의사도 많습니다. 하지만 인격은 학력이나 직업, 직책과는 무관하지요. 사람이 갑질에 익숙해지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워집니다. 어떤 의사는 평소 간호사들에게 농담을 자주 했는데, 자취하는 간호사에게 "너 남자친구 때문에 자취하는 거지?"라고 자꾸 물었습니다. 성격 좋은 그 간호사는 "아 뭐예요~" 웃어넘기곤 했지요. "뭔 개소리예요?" 할 수는 없으니까요. (해도 됩니다) 평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저는 그 의사가 애처럼 보였습니다. 웃으며 여자애들을 괴롭히는 철없는 소년이요. 


그러다 그 의사와 제가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제 뒤에서 갑자기 "어제 남자친구 만났어? 목 뒤가 빨갛네." 하더군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수술방 안에는 남자 직원이 둘이나 더 있었죠. 남자 직원들이 저보다 더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제가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자 의사는 말했습니다.

"장난인데 왜 정색을 해~ 무섭네."

저는 수술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으로 이 새끼를 어쩔까 궁리하고 있었지요. 퇴근하자마자, 저는 카톡을 보냈습니다.

아까 같은 농담은 상당히 불쾌하네요.

처음이니까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그 의사 선생님은 제 카톡을 읽자마자 '미안합니다'라고 답장했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회식 자리에서 저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좀 그런 면이... 잘 안 고쳐지더라고... 그때 말해줘서 고마워." 다른 간호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나 XXX한테 장난쳤다가 호되게 당했잖아~" 하더군요. 물론 더 이상의 실수는 없었고요. 이건 나름 해피엔딩이지만, 새드엔딩도 있습니다.


상습적으로 성희롱을 하던 다른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 의사 때문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간호사 한 명이 병원을 그만둘 정도였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간호사에게 또 실언을 했습니다. 이 간호사는 원내 윤리위원회에 진정을 넣었고, 의사는 간호사에게 사과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마 여기서 재빠르게 사과했다면 일은 커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의사는 간호사가 곡해한 거라며 발뺌을 했고, 설상가상으로 위원회는 사건을 대충 무마하려고 했습니다. 피해 간호사는 인권위에 진정하겠다며 난리였고요.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그 이야길 듣고 저는 바로 종이 몇 장을 출력했습니다. 코팅해서 슬쩍 수술실 자동문에 붙였지요.

-환자와 직원을 폭언과 성희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모든 수술이 녹음 및 녹화됩니다.

십여 분 뒤 수선생님이 저를 호출했습니다. 네가 붙인 거냐고 물으시고는 한숨을 쉬셨습니다. 마음은 알겠다만 이러면 의사들이 기분 나빠할 거라고 하더군요.

"간호사들이 더 기분 나쁩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걸 두고 봐야 하나요? 사람 부족해 죽겠는데 자꾸 이렇게 그만두게 하실 건가요? 인력관리 차원에서 붙이게 해주세요."

간호사들의 분노가 모여 징계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됐고, 경영진에 탄원서가 올라갔습니다. 간호사들은 열심히 사건을 공론화했습니다. 결국 해당 의사는 보직 해제, 직급과 호봉 강등처분을 받고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습니다. 의사들을 대상으로 성희롱 방지 교육도 이뤄졌지요. 피해 간호사는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끝까지 버텼습니다. 저를 비롯한 동료 간호사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고요.


나중에 간호 부장님이 절 불러서, 이렇게 시끄럽게 해서 좋을게 뭐가 있냐고 했습니다. 제 평판이 나빠진다면서요.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서운하네요. 안 그래도 힘든데 이런 것까지 참으라면 간호사들 다 그만둡니다. 제 평판이요? 의사들 그러는 거 소문나면 병원 평판은 어쩝니까? 그게 더 중요하지 않나요?"

부장님은 이마를 짚으며 가보라고 했고, 저는 돌아서서 나오며 씩 웃었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면 모두가 힘드니 가해자는 신속하게 사과해야 합니다


친해서 장난으로 하는 말과 성희롱은 완전히 다릅니다. 장난은 함께 웃지만, 희롱은 한쪽만 웃습니다. 장난은 금세 잊히고, 희롱은 자꾸 생각납니다. 희롱은 상대를 짓밟고 깔아뭉개기 때문입니다.


성희롱에 대처하는 방법은 언뜻 두 가지뿐인 것 같습니다. 정면 돌파하거나, 덮고 침묵하거나. 정면돌파는 힘들고 불편하기 때문에 보통 후자를 선택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3의 방법이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희롱을 희롱하는 방법입니다. 약간의 뻔뻔함만 있다면 매우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3박 4일로 멀리 학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해당 과의 의사와 간호사 둘, 그리고 스폰서로 의료업체 직원이 동행했습니다. (모두가 거절하는 바람에) 비록 차출돼 간 학회였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저녁을 먹고 와인 바에 갔습니다. 시간이 지나 얼큰하게 취한 의사는 말했습니다.

"어우~ 피곤한데 우리 XXX 간호사가 안마 좀 해줬으면 좋겠다~"

저는 눈썹을 치켜뜨고 되물었습니다.

"안마요?"

의사는 덧붙였지요.

"안마 다 하고 나서 볼에 뽀뽀도 해주면 좋고~"

저는 곁에 둔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으며 중얼거렸지요.

"남자들은 이게 문제야. 하나 해주고 열을 바라니... 지금 몇 시예요? 간호부장님 전화 받으시려나..."

의사는 어이쿠, 웃으며 알았다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저는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고소해서 깔깔 웃었지요. 잠도 푹 잤습니다. 학회 일정은 무사히 끝났고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나이도 지긋하고 직책도 높은데, 질 낮은 농담을 일삼던 의사가 있었죠. 그분의 관심사는 ‘기승 전 여자’였습니다. 시작이 어떻든 끝은 항상 여자였지요. 함께 수술하는데 대학 시절 이야기가 나왔고, 저는 한남동에서 실습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 왈,

"거기 한남동 주택가? 거기... 가정집 아닌 곳이 있어. 요정이 있다."

요정은 접대비가 수천만 원에 이르는, 텐프로 같은 고급 술집을 말합니다. 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가보셨어요?"

의사는 “친한 형이랑 갔는데~”로 시작해 무용담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발랄하게 마무리했지요.

"명의 OOO가 추천하는 한남동 텐프로! 우리 아빠한테도 알려줘야겠다."

할아버지는 저를 한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어시스트였던 남자 간호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웃음을 참았고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렇게 혼잣말로 가장하고 발랄하게(?) 집어 던질 수 있는 말은 정말 많습니다. 농담인 척 세게 꼬집어 주는 겁니다.

"헐! 성희롱이다 소문내야지"

"요즘 그러면 철컹철컹인데!"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네요?"

"우리 수선생님 좀 불러주세요~"

"이상하네 기분이 왜 이렇게 더럽지?"

"우리 아빠가 알면 병원 뿌시겠다."

"이거 완전 신고 감이네..."

"사람 봐가면서 해야 하는데...ㅉㅉ"

"재밌으세요? 재미없는데..."

보통 우리 20대 여성은 관록이 없어 받아칠 줄 모르고, 이럴 땐 어떻게 하라고 배운 적도 없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얼굴을 붉히며 당황할 수밖에 없지요. 직속 상사나 인사팀에 보고해봤자 당사자만 여러 번 불려가 진술하고 그 심각성은 옅어집니다. 노조나 인권위에 말할까요? 아마 망설여질 겁니다.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역시 당사자가 피로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이 정작 가해자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뒤에서 푸념합니다. 왜죠? 말하면 뭔가 큰일이 날 것 같나요? 권고사직이나 불이익 그런 거? 


실수는 상대방이 먼저 했습니다. 분위기는 당신이 아니라 상대가 먼저 망쳤습니다. 애써 웃으며 표정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같잖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하지 말고 분노를 표출하세요. 화내고, 빈정대고, 욕하고, 창피 주고, 소문내고, 놀리세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참으면 힘들고 괴로워집니다. 불쾌감을 마음껏 드러내고 나는 당신이 함부로 농담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려줍시다. 당신은 그 사람의 애인도, 와이프도 아니니까요.

"침묵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 이 글은 외부 필진 ‘엄지’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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