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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왜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렸을까?

조회수 2020. 4. 21.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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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속 녹아내리는 시계는 무슨 의미일까?
“당신은 예술에 어떤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예술에? 아무것도. 완전히 아무것도.
왜냐하면 나는 항상 말해왔듯이 나쁜 화가다
나는 좋은 화가가 되기엔
너무 똑똑하다”
'살바도르 달리'

초현실주의의 거장
기행을 일삼는 종잡을 수 없는 천재
현실에선 볼 수 없는 이미지와 환상과 비극을 오가는 분위기
그럼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교한 묘사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만들어진 그의 화풍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꿈과 같은 광경을 담아내는 달리의 작품 중에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로 '녹아내리는 시계'죠.

달리 작품 속 녹아내리는 시계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으로 사람들 사이 회자되곤 합니다.
또 많은 패러디를 만들며 현대에는 초현실주의 자체를 의미하는 상징이 되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왜 달리는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렸을까요?

달리의 그림은 정말 특이합니다.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듯한 이미지 속에 온갖 기호와 상징들로 가득차 있죠.

기호들은 마치 아무 의미없이 나열된 것 같지만, 때로는 관능적으로 또 때로는 고독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덕분에 달리의 작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요.

사실 달리가 처음부터 초현실적인 작품을 선보인 것은 아닙니다.

달리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큰 관심을 보였고, 덕분에 10대 시절 드로잉 학교에 입학했는데요.
이 시기엔 당시 유럽사회에서 유행하던 인상파를 많이 접했고 이 영향을 많이 받았죠.

때문에 달리의 초기작에서는 인상주의 회화의 느낌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리는 더 많은 화풍들을 접하게 되는데요.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기계문명의 속도와 특징을 담아낸 미래파 화풍.

시공간을 작가 마음대로 조작해 작품 속에 표현해내는 입체파 화풍 모두 달리를 매료시켰습니다.
덕분에 이 시기에 그려진 달리의 그림 속에선
인상주의와 미래파,

그리고 입체파 화풍이 혼재된 인상을 쉽게 볼 수 있죠.

이 당시 달리의 그림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 정도로 기본기가 탄탄했습니다.

왕립미술학교에 진학한 달리는 이미 학교 안에서 멋쟁이로 소문이 났습니다.
유난히 자신을 꾸미고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달리는 특유의 댄디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죠.

달리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이는 자신이 존경하던 스페인의 고전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오마쥬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달리는 이 시기 특히나 입체파 화풍에 심취해 작품을 많이 만들었는데요.
신기하게도 당시 마드리드에선 입체파를 그리는 작가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달리의 독특한 화풍은 눈에 띄었고, 많은 관심을 받게 되죠.

특히나 1923년에 그려진 <late night dreams>는 입체파와 미래파 영향이 모두 어우러진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다양한 시공간과 기계문명이 어우러진 모습.
달리는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었죠.
이 시기 달리는 또한 프로이트와 로트레아몽 책을 즐겨 읽었는데요.

두 사람 모두 사람의 ‘무의식’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밝혀내려 한 학자였습니다.

또한 로트레아몽은 무의식을 작품 속에 녹여낸 19세기 시인이었죠.

알듯말듯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의식의 세계는 달리에게 새로운 영감이 됩니다.

1926년 달리는 왕립학교를 나오게 되는데요.

마지막 기말고사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러 퇴학당했다는 의견과
학교에서 더이상 배울 것이 없어 자퇴했다는 의견 모두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학교를 나온 이후 달리는 친하게 지내던 비평가 등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전시를 열기 시작하는데요.

이 시기 내놓은 <Composition with Three Figures>는
관람객과 평단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극찬을 받기도 하죠.

덕분에 달리는 본격적으로 미술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927년을 기점으로 달리의 화풍은 변화하기 시작하는데요.

이 시기 작품들 속에선 현실적인 이미지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의미가 모호한 기호와 상징이 많아지기 시작하죠.
이는 당시 유럽사회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던 초현실주의 화풍의 모양새를 띄었습니다.

초현실주의는 당시 전쟁 이전의 사회를 지탱하던 가치관에 대한 회의로 탄생한 화풍이었습니다.

우리가 소위 이성이라 믿어 온 것들이 되려 전쟁과 같은 비극을 만들어내자, 예술가들은 고민에 빠졌죠.

이때 프로이트를 비롯한 학자들에 의해 ‘무의식’이란 개념이 새롭게 대두됐는데요.

예술가들은 이 미지의 개념에 매료됐죠.
도덕적인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순 없을까?

초현실주의는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무의식에 내재돼 있는 각종 이미지를 꺼내는 실험이었습니다.

이 시기 그려진 ‘꿀은 피보다 달콤하다’는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환상적인 결합이라는 평가받습니다.
꿈같은 이미지와 갖가지 상징들, 그리고 불명확한 소재임에도 정교한 묘사와 풍부한 빛의 표현

평단에선 이 작품을 두고 달리가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자가 된 것인지 토론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달리 작품 속에는 무의식에서 나타날 법한 관능적이면서 상징적인 기호들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인간 본연의 욕구들을 담아낸 것이었죠.

1928년에는 ‘불만족스러운 욕구’라는 작품을 바로셀로나 한 갤러리에 출품하는데요.
출품을 거부당하고 말죠.

갤러리는 “특정 감정에 준비가 덜 된 관객들이 많이 방문하는 대다수의 갤러리에 맞지 않는 작품”이라 이유를 붙였습니다.

이 문제작은 바르셀로나 언론에 대서특필됐고, 달리와 그의 화풍이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작품에서도 달리는 무의식적 욕망을 그리는 작품들을 계속해서 선보이며 전시를 이어나갔습니다.

하루는 파리에서 자신의 초현실주의 작품들로 전시를 선보였는데요.
이 당시 미술관을 찾아온 사람 중엔 안드레 브루통도 있었습니다.

브루통은 당시 초현실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시인이자 화가였죠.
그는 달리의 작품을 “여지껏 역사 속에 만들어진 모든 작품 중 가장 환상에 가깝다”고 평가했습니다.

이후 달리는 브루통의 주창아래 만들어진 초현실주의 그룹에 들어가죠.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화풍을 계속해서 실험하던 달리는
1931년 마침내 자신의 걸작 ‘기억의 지속’을 만듭니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정수로 평가받는데요.

마치 꿈을 그려넣은 듯한 모습 속, 낯설고도 익숙한 상징물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습니다.

특히나 작품 속 흘러내리는 시계는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불변의 가치로 여겨지는 시간의 개념도 무의식 속에선 너무도 쉽게 변해버렸죠.
몇몇 비평가는 이 작품이 1930년대에 유행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영향을 받았다고도 평가하는데요.

하지만 달리는 이러한 의견에 반대했습니다.

자신은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태양에 녹는 까망베르 치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죠.

달리는 꿈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무의미하고 애매모호한 형상들에 집중했습니다.
평상시 우리의 무의식 사이 떠도는 소재들은 꿈속에서 마구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는데요.

때문에 달리 작품 속의 이미지들도 복합적이고 무의미한 형태를 띄었습니다.

이 작품 속 가운데에는 구겨진 유체가 보이기도 하는데요.

마치 오리처럼 보이는 이 물체는 많은 평론가들이 살바도르 달리 본인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마치 꿈속에서 마주한 사람의 얼굴이 다음날 깨어나선 잘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분간하기 힘든 형상을 하고 있죠.
이 작품 특유의 분위기와 상징은 ‘초현실’과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도 강렬하게 각인시켰습니다.

이후 녹는 시계는 초현실주의의 상징이 되었죠.

달리는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예술가로 거듭납니다.

TV쇼나 영화 속에서도 본인 스스로와 예술세계를 전파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죠.

특히나 초현실주의 예술가로서 특이한 행동들을 선보이며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했는데요.

달리는 항상 자기 자신이 초현실주의 자체라고 말했죠.
더 다양한 작품과 함께 ‘살바도르 달리’ 그 자체가 사람들 사이 각인되며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초현실주의 작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도 초현실을 통해 기존 사회 체제의 불안정을 짚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 여기곤 했죠.
하지만 이에 대해 달리는 항상 모호한 입장을 내보였습니다.
또한 순수함과 엄격함을 추구하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농담과 조소로 가득찬 달리의 언행은 눈밖에 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초현실주의 그룹의 창시자 브루통은 달리를 그룹으로부터 제명시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엔 다양한 예술가와 협업하며 사진, 영화 등 20세기 새롭게 발전한 매체를 활용하기도 했는데요.

덕분에 다양한 매체로 발전한 작품들이 탄생했습니다.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는 고전주의 회화를 다시금 자신의 작품을 녹이는 시도들도 선보였는데요.

카톨릭의 신비성 뿐만 아니라 원자과학 같은 새로운 영역 또한 예술에 담아내고자 노력했습니다.

달리의 도전과 변화는 끝이 없었죠.

말년에 들어서 달리는 신경쇠약과 우울, 건강악화를 얻게 됩니다.

오히려 무대연출이나 미술관 천장화, 입체 작품 등 작품의 스펙트럼도 더 다양해졌습니다.

하지만 76세가 되던 1980년 중풍의 영향으로 달리는 붓을 잡기 어여울 정도가 됩니다.

더 이상 작품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죠.
이 시기엔 오랜 뮤즈였던 갈라와 불화가 이어졌는데요.

정작 갈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달리는 삶의 의지마저 잃게 됩니다.
1984년 그의 저택에 화재가 발생해 친구들이 그를 구조하는데요.

일부에선 달리 스스로가 방화를 저질렀다고 보기도 합니다.
1989년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세블록 떨어진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수많은 명작과 또 수많은 기행들.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평가는 달리가 살아있던 당시에도, 지금에도 엇갈립니다.

때로는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거장으로, 또 때로는 명성과 달러에 굶주린 화가로 불리죠.
하지만 아무도 그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의 대가였단 사실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최고의 즐거움을 경험한다.
그것은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와 작품에 대한 확신으로 끊임없이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세계를 탄생시킨 살바도르 달리.

달리의 그림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것들을 마주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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