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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가 다 전두환은 아니지만

조회수 2020. 6. 11.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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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2012)

미술관을 턴 뽀빠이(이정재 역) 일당이 거처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동료들을 급히 숨긴 뽀빠이가 경찰 반장(주진모 역)과 대화를 나눈다. 


반장은 뽀빠이가 미술관을 턴 범인이라고 확신하며 사진을 한 장 들이민다. 그 사진에는 도둑 일당 중 한 명이 자전거를 타고 도주하는 모습이 찍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뒷모습만 찍혔다. 뒷모습만으로는 당연히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없다.


반장은 뒷모습의 주인공이 뽀빠이일 것이라 확신하고 사진을 건네며 뽀빠이를 떠본다.


반장 : 뽀빠이, 너 사진 잘 나왔다. 거기서 자전거는 왜 탔을까?


뽀빠이 : (뒷모습이 찍힌 사진을 확인한 후) 아니, 이게 나라고? 아이 XX, 뭐 머리만 벗겨지면 다 전두환이야? 

미리 이야기하지만 나도 머리숱이 한참 부족한 사람이어서, 탈모를 가지고 희화화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빠, 흰 머리 뽑아줄까?”라고 접근하면 나는 “흰 머리를 뽑아? 머리를 도대체 왜 뽑아? 희다고 뽑아? 흑백차별이야 뭐야!”라며 화를 버럭 냈던 사람이다. 즉 나 역시 예비 탈모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글에서 탈모인을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음을 사전에 분명히 밝힌다. 


뽀빠이의 “머리만 벗겨지면 다 전두환이야?”라는 반론은, 행동경제학에서 ‘대표성 휴리스틱(representativeness heuristic)이라고 부르는 이론의 핵심 내용이다. 


인간은 판단을 할 때 그다지 정교한 계산을 하는 동물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인간은 대부분의 판단을 ‘대충 찍어서’ 한다. 비슷해 보이는 물건인데도 가격이 다를 때, 우리는 제품과 가격을 꼼꼼히 비교한 뒤 사지 않는다. “싼 게 비지떡이야”라는 속담만 믿고 비싼 걸 덜컥 집는다. 아니면 “싼 게 장땡이지”라는 소신으로 싼 걸 덜컥 집거나!

찍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인간은 원래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하는 동물이다. 생각을 하는 데에는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뇌는 언제나 최소한의 에너지를 써서 효율을 높이고자 한다. 세상만사를 판단할 때 늘 뇌를 풀가동하면 피곤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 복잡한 생각을 접고 대충 찍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인간의 뇌가 살아남는 효율적인 비법일 수도 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런 찍는 기술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부른다. 생각 과정을 최소화해 찍어버리는 뇌의 습관을 뜻한다. 그리고 휴리스틱 중 대표적인 것이 ‘대표성 휴리스틱’이다.


대표성 휴리스틱이란 어떤 대상을 평가할 때, 속성 여러 가지를 꼼꼼히 분석하지 않고 그 대상의 대표적 속성 한 두 가지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뜻한다. 


예를 들어 “김지성 씨는 안경을 낀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로 평소 베토벤과 드보르작 음악을 즐겨 듣는다. 김지성 씨의 직업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있다. ①서울대학교 교수 ②영세 자영업자 두 개의 보기 중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실험을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①을 정답으로 고른다. 그런데 이는 확률적으로 매우 큰 잘못이다. 서울대학교 교수는 명예교수까지 합쳐도 많아야 4,000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국의 자영업자 숫자는 600만 명에 육박한다. 즉 김지성 씨의 직업은 자영업자일 확률이 훨씬 높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②를 답으로 골라야 옳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①을 선택한다. 이유는 ‘클래식을 듣고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사람’이 대학교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뇌는 복잡하게 확률 따지는 것을 싫어한다. ‘안경 쓰고 호리호리해? 클래식 들어? OK. 그건 교수의 전형적 모습이므로 ①이 답이겠지’라고 뇌는 대충 찍어버린다.


“머리만 벗겨지면 다 전두환이야?”이라는 뽀빠이의 반론은 반장의 대표성 휴리스틱을 통렬히 논박한다. 우리는 전두환의 대표적 특성이 ‘벗겨진 머리’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전두환이 악당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머리 벗겨진 악당은 왠지 전두환일 것이라는 휴리스틱을 갖고 있다. 


뽀빠이는 지금 “반장님. 털린 미술관 근처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적발되면 그게 왠지 뽀빠이일 것 같죠? 그건 대표성 휴리스틱이라고요”라고 멋지게 반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뽀빠이의 반론은 멋있었는데, 범인은 뽀빠이가 맞았다는 사실! “머리 벗겨지면 다 전두환이야?”라고 반론했는데, 그 머리 벗겨진 사람이 진짜로 전두환이었던 거다. 가끔 실수가 진실이 되고, 합리적 추정이 오류가 되기도 한다. 이래서 현실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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