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에게 박제돼 전시됐던 흑인 '엘 네그로' 이야기

조회수 2020. 12. 20. 07: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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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진짜 사람이라는 걸 알게되고 수치심에 가득 차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습니다.
19세기 초 유럽에선 전 세계 동물을 전시하는 박람회가 유행이었다. 심지어 한 프랑스 상인은 아프리카 전사의 유체를 전시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작가 프랑크 베스터만(Frank Westerman)은 30년 전 스페인의 어느 박물관에 그 '전시품'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추적했다

1983년 네덜란드에서 대학을 다니던 저는 스페인에서 히치하이킹 여행을 하던 중 그 아프리카 유체를 만났습니다. 당시 저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바뇰레스(Banyoles)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다르데르(Darder) 자연사박물관 바로 옆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 진짜야!”


한 학생이 제게 소리쳤습니다.


“누가 진짜라고?”


“엘 네그로(El Negro)!”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 학생의 음성은 광장에 퍼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중년 여성이 카디건을 어깨에 걸친 채 미용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뾰족한 턱에 머리카락이 성성한 그녀는 열쇠꾸러미를 묵주처럼 손가락으로 세고 있었습니다. 세노라 롤라(Senora Lola)였습니다. 그는 박물관의 문을 열고 제게 표를 팔며 파충류 관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저는 인류관을 보려던 참이었으므로 고릴라와 원숭이가 있던 포유류관을 지나쳤습니다. 그곳에 바뇰레스의 ‘엘 네그로(El Negro)’가 있었습니다. 창과 방패를 든 그는 라피야 야자나무 잎 장식과 두꺼운 주황색 천으로 하반신을 가린 채 서 있었습니다.


엘 네그로는 카펫 한가운데 전시돼 있었습니다.


마담 투소(Madame Tussaud’s)의 밀랍인형과는 달랐습니다. 거기 서 있던 흑인 남성은 인형도, 미라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박제된 채 다른 야생동물과 함께 전시돼 있었습니다. 이 아프리카 흑인은 피해자인 셈입니다. 물론, 가해자는 유럽에 살던 백인이었습니다. 인종차별이 존재했던 당시, 그 반대는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순식간에 수치심에 가득 차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노라 롤라는 그에 대한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카탈로그나 팸플릿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사진엽서를 툭툭 치며 안경 너머로 저를 응시했습니다. 저는 엘 네그로의 사진을 집어 들어 뒷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르데르 박물관, 바뇰레스, 베추아나(Museo Darder – Banyoles. Bechuana)’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베추아나!? (보츠와나의 Bantu 인의 옛 이름)”


세노라 롤라는 “엽서는 한 장에 40페세타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두 장을 구매했습니다.


20년 후 저는 보츠와나에서 바뇰레스에 이르는, 그리고 다시 바뇰레스에서 보츠와나에 이르는 엘 네그로의 기상천외한 여정을 책으로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야기는 프랑스 상인 쥘 베로(Jules Verreaux)가 1831년 케이프타운에서 북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시작됩니다. 한 아프리카 전사의 장례식을 목격하는 데서 말이죠. 쥘은 그날 밤 시체가 묻혔던 곳으로 돌아와 전사의 피부, 두개골, 약간의 뼈를 도굴합니다.


베로는 부족한 뼈를 철사와 목판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신문지로 포장해 파리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엘 네르고’는 수집된 다른 동물들과 함께 생 피아크르가(Rue Saint Fiacre) 3번 전시실에 전시됐습니다.


신문 르 콩스튀티쇼넬(Le Constitutionnel)은 “야만적인 흑인 원주민들 속”에서 많은 위험을 겪었을 쥘 베로의 용감함을 칭송했습니다. 기사는 보츠와나인이 기린, 하이에나, 타조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다며 “그는 검은 피부에 체구가 작으며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을 갖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전사는 반세기가 지나서야 스페인에 등장했습니다. 1888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에서 프랜시스코 다르데르(Francisco Darder)는 그를 “엘 베추아나스(El Betchuanas)”라는 카탈로그에 소개하며 창과 방패를 들고 라피아 야자나무 잎으로 장식한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선 피레네 산맥 발치에 있는 바뇰레스(Banyoles)로 옮겨졌습니다. 오랜 여행으로 그의 출신지는 거의 잊혔습니다. 심지어 그의 발치에 놓인 소개에는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이라는 잘못된 내용이 적히기도 했습니다. 후에선 그런 정보마저 사라지고 ‘엘 네그로’란 이름만 남겨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 쥘 베로가 그에게 입혔던 샅바는 바뇰레스의 로만-카톨릭 큐레이터에 의해 더욱 점잖다고 여겨지는 주황색 치마로 대체됐습니다. 또한, 원래 모습보다 더 검게 보이도록 구두약이 덧발라졌습니다.


전시장에 서 있는 그는 참혹한 방식으로 과거 유럽 식민주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20세기가 되자 ‘엘 네그로’는 더욱더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인종차별, 무덤 도굴, 유체 약탈 외에도 그가 상징하던 19세기 유럽의 유산이 더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92년 아이티 출신의 스페인 의사 알폰스 아르셀린(Alphonse Arcelin)이 엘 파이스(El Pais)지에 ‘엘 네그로’를 박물관 전시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글을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곧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바뇰레스 호수에서는 조정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아르셀린은 박물관을 방문하는 이들이 흑인 남성이 전시된 문제에 대해 불쾌해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문제 제기는 미국의 목사 제시 잭슨(Jesse Jackson)과 농구선수 매직 존슨, 당시 UN 부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 등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국보로 여겼던 카탈루냐인들 중 일부의 강한 저항으로 1997년 3월이나 돼서야 ‘엘 네그로’는 일반 관람객의 시야에서 벗어나 수장고에 보관됐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2000년 가을이 돼서야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아프리카 통일 기구(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와의 기나긴 협상 끝에 ‘엘 네그로’를 아프리카 땅에 재매장하기로 합니다. 반환 과정의 첫 단계는 한밤중 트럭에 실려 마드리드를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마드리드에 도착 후 그의 몸을 채웠던 유리눈, 철사, 목판 등의 인공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구두약을 칠해진 피부는 그 영향으로 바스러져 땅에 떨어졌습니다. 결국, 피부는 스페인에 남겨졌습니다.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그의 피부는 한 곳에 모여 마드리드의 인류학 박물관에 보관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츠와나로 향하는 관에는 그의 두개골과 사지골의 일부만 담겼습니다.


보츠와나 전사의 유체는 보츠와나 수도인 가보로네(Gaborone)에 하루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때 약 1만여 명이 보츠와나 사람들이 그의 여정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다음날인 2000년 10월 5일 그는 촐로펠로(Tsholofelo) 공원에 묻혔습니다.

기독교식 장례였습니다. 목사는 그의 손을 성경 위에 놓고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었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보츠와나 외교부장관인 몸파티 므라피(Mompati Merafhe)는 “우리는 용서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라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의 죄악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러한 죄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축복의 말들이 이어지고 노래와 춤이 이어졌습니다. 나팔수들은 흰 장갑을 낀 채 마지막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윽고 그의 무덤은 수년 동안 사람들 기억에서 잊힙니다. 주변의 공간은 축구장으로 사용됐습니다. 최근에서야 보츠와나 정부가 나서 무덤을 정비하고 안내 센터와 표식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2016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아프리카의 아들’이 누구이며,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고, 그가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1995년 카탈루냐 병원에서 부검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엘 네그로’는 27년 정도를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키는 135~140cm 정도였을 것입니다. 사인은 아마 폐렴이었던 것 같습니다. (BBC)


번역: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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