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퀼팅
추운 겨울날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아랫목에는 언제나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누비이불이 깔려 있었다. 신기하리만치 정확하게 계산된 정사각형 네모로 구성된 이불을 바라보며 검지손가락으로 재봉선을 쓸어내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무릎 담요와 침실용 이불을 구분하는 요즘에는 흔히 볼 수 없는 옛날식 디자인이 되었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네 이불장에 누비이불 하나쯤은 필수였다. 이런 오래된 기억 때문일까. 퀼팅 소재는 친근한 만큼 진부한 직물처럼 느껴진다. 누비질한 옷이나 각종 액세서리가 사극이나 시대극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을 보면 퀼팅 소재는 모두에게 비슷한 느낌으로 남아 있을 테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소재에 대한 편견이 전 세계 공통 흐름이라는 것이다. 소재 사이에 부드러운 심을 넣고 전체를 박음질로 장식한 원단은 중세 시대 왕족이나 귀족도 즐기던 원단이었고, 역사적으로도 품위 있는 소재로 각인되어 있다. 한마디로 요즘 유행으로 보기엔 어렵다는 거다. 적어도 2020 F/W 시즌 퀼팅 소재가 트렌드로 떠오르기 전까지 말이다.
2020 F/W 시즌 디자이너들은 퀼팅 소재에 집중했다. 소재 사이 솜을 압축해 만드는 제작 과정의 특성상 보온이 뛰어나거니와 겉부분에 보이는 직물에 따라 다양한 무드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산물에 요즘식 해석을 가미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디자이너들이 먼저 발 벗고 나섰다.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 샤넬의 버지니 비아르, 알렉산더 맥퀸의 사라 버튼 등 거대 패션 하우스의 디렉터부터 아틀랭, 카이단 에디션스 같은 샛별들의 해석이 편견을 깨트린다. 프릴 디테일로 중세 시대의 낭만을 더하거나 셔츠 드레스나 후디처럼 예상치 못한 아이템에 적용하기도 한다. 코트와 재킷, 백에 국한되었던 퀼팅의 지루한 패션 히스토리가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지금의 퀼팅 소재는 계절에 맞게 의례적으로 선보이던 단조로운 시각을 완전히 탈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