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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황제 펠레가 국민 영웅으로 불리는 진짜 이유

조회수 2021. 3. 18. 1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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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이콘이었던 펠레의 일대기
출처: '펠레'
브라질의 축구 황제 펠레, 그의 활약을 그 시대에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그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 유일의 월드컵 3회 우승 경험을 가진 선수이자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압도적인 득점을 올렸던 선수, 브라질의 국민 영웅 펠레.  

그가 브라질의 영웅으로 불렸던 이유는 단순히 기록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때는 '역동하는 브라질'의 상징이었고, 또 한때는 '억압받는 현실의 도피처'였던 그의 시대적 상징성 때문이다. 
출처: '펠레'

펠레가 어린 아이였던 1940년, 당시 브라질은 덜 알려진 국가였다. 어린 펠레의 아버지는 축구 선수였다. 하교 후 매일 축구를 했던 펠레는 아버지처럼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는 펠레의 재능을 발견하고 산투스의 축구 클럽에 데려갔다. 펠레는 첫 훈련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출처: '펠레'

그렇게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그는 어느 새 1958년 스웨덴 월드컵 팀에 참가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겨우 17세였던 펠레는 마치 축구의 신이 강림한 듯 날아다녔다. 매 경기마다 골을 터트리며 브라질에 우승 타이틀을 안겼다. 


펠레는 영웅이었다. 1950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하며 실추됐던 브라질 사람들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준 영웅. 

출처: '펠레'

펠레의 유명세는 쭉 오르막이었다. 흑인, 백인, 혼혈,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브라질인들이 그를 사랑했다. 빈민가의 가난한 아이들은 '나도 펠레가 될 것이다'라는 꿈을 꿨다. 


지역 클럽이었던 산투스는 펠레의 인기로 인해 전 유럽에서 경기 제안이 몰려오는 유명 구단이 됐다. 원정 경기를 갈 때마다 각국 축구팬들이 펠레를 연호했다. 

출처: '펠레'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의 브라질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나라였다. 펠레는 희망 가득한 브라질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선수가 아닌 '국가 기관'이라 칭하기도 했다. 펠레의 이름이 붙으면 모든 것이 날개 돋힌 듯 팔렸다. 외국에서 브라질은 '펠레의 나라'로 설명됐다. 

출처: '펠레'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도 브라질 대표팀은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 중 부상을 입은 펠레는 후반부 경기에 뛰지 못했지만 여전히 펠레는 사랑받는 축구선수였고,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출처: '펠레'

영원할 것 같았던 '희망의 브라질'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64년, 군사 쿠데타로 군부가 정권을 잡았고, 브라질 민주주의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독재정권 하에서도 축구는 계속됐다. 정치권에서 펠레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펠레가 입은 피해는 없었다. 여전히 그는 스타의 위치에 있었다. 

출처: '펠레'

그런 상황에서 펠레가 가지는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다음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은 이미 당연히 우승을 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차 있었다. 물론 그 근거는 펠레에 대한 믿음이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브라질이 예선탈락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브라질의 몰락이자 펠레의 몰락이라고 말했다. 

출처: '펠레'

펠레는 1968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해, 브라질 독재 정권은 악명 높은 제도 법령 제5조를 발령했다. 


정부가 안전, 질서, 평화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이 법령은 국민의 모든 자유를 국가가 억압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 

출처: '펠레'

그의 스타성이 독재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고통스러운 시기에 축구는 국민들의 도피처였고, 동시에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독재 정권의 대통령은 국민 영웅인 그를 꾸준히 치하했다. 


펠레는 독재 정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축하 인사에 응하기도 했다. 펠레의 이 같은 자세는 두 가지 시선을 받았다. 독재 정권 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시선과 파급력을 가진 그가 나섰어야 한다는 비판이 공존했다. 

출처: '펠레'
"우리 브라질에 매우 중요한 월드컵이었죠. 하지만 그 순간에 저는 펠레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펠레가 되기 싫었어요." (펠레)
1970년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 대표팀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대표팀의 주요 인사들은 군인으로 대체됐다. 이미 지난 월드컵 이후 다시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 했던 펠레도 월드컵 출전 압박을 받고 있었다. 
출처: '펠레'
"전 역사에 남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번에 끝이었습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결심했죠." (펠레)

이미 두 차례의 월드컵에서 초반 부상으로 활약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 펠레에게 네 번째 월드컵은 무거운 과제였다. 그럼에도 인생 마지막 월드컵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담감이 엄청났지만, 동시에 월드컵 무대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다.


펠레는 국민들을 위한 희생이 아닌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했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국민들은 펠레의 월드컵 귀환에 열광했다.

출처: '펠레'

부담감을 가득 안고 출전한 월드컵에서 펠레와 브라질 선수들은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며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브라질은 여전히 독재 정권 하에 있었고, 대통령은 월드컵의 성과를 선전하기 바빴지만 국민들은 이를 정부의 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펠레는 그렇게 축구 인생 마지막 월드컵에서 또 한 번 국민들에게 기쁨을 준 영웅이 됐다. 

출처: '펠레'
브라질의 상징이었던 펠레, 다사다난했던 그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펠레'를 넷플릭스가 선보였다. 

축구 영웅의 삶과 무결하지는 않았던 그의 개인사, 정치 상황에 입을 다물었던 그의 행보에 대한 두 가지 시선까지 모두 담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펠레', 지금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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