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도(道) - 골프를 바라보는 시각

조회수 2021. 03. 29. 06: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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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고찰

골프 도(道)


R형, 골프에 대해 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골프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불교에 관한 학위논문 자료 수십 차 일본 동경대학에 가서 좀 있었는데, 일본에 가서 보니 일본 전체가 골프에 미친 것 같았습니다. 주차장 위, 이층집 옥상, 강둑, 산마루, 산허리 등 어디에나 터만 있으면 골프 연습장을 차려놓고, TV에도 이 채널 저 채널 골프에 관한 방송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살고 계시던 제 형님도 사업 관계로 골프를 열심히 치고 계셨습니다. 저보고도 같이 가자고 해서 몇 번 따라갔습니다.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가서 채를 휘두르니 공이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자연히 골프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는 길에 LA에 들렸는데, 거기 사신 작은 형님도 골프를 열심히 치고 계셨습니다. 골프에 뭐가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골프를 본격적으로 쳐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마이클 머피(Michael Murphy)가 쓴 Golf in the Kingdom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활쏘기 궁도의 정신적인 측면을 다루는 오이겐 헤리겔(Euen Herrigel)의 Zen in the Art of Archery와 같이 스포츠가 단순히 스포츠로 그치지 않고, 심신수련, 인격도야, 정신수양 같은 정신적 면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골프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고 할까 도를 닦는다고 할까 하는 책입니다. 머피는 유명한 산프란시스코 남쪽에 있는 Esalen Institute의 창설자인데, 이곳 출신의 한 사람이 쓴 The Inner Game of Tennis와 같은 계열의 책입니다.


이런 책들 덕분에 골프를 쳐보기로 하고 시작했습니다. 치면서 거기에 대해 제 나름대로 느끼고 알게 된 것들을 두서 없이 좀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아래 글은 사실 40여년 전에 쓴 글로 1995년인가 한국에서 나온 어느 골프 잡지에도 게재되었던 것인데(김미현이 고등학생으로 그 골프잡지 표지사진으로 나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기서 좀 요약하고 수정해서 다시 정리해 봅니다.


골프는 왜?


골프 치는 것이 왜 유행일까요? 큰 형님의 경우 어느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사업상’, ‘교제상’의 이유로 친 것 같습니다. 작은 형님의 경우는 직장에 매여 고달프게 살아가는데, 틈 나는 대로 시원한 들판에 나가 신선한 바람을 쐬고 오는 것이 살맛나는 일로 ‘기분상’ 이유로 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외에 친구들과 사귀는 ‘사교상’이유로,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잘 안 되는 기막힌 묘미에 미쳐서 계속 치게 된다는 ‘중독성’ 이유로 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좀 더 근본적인 역사적 이유를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옛날 수렵시대 사냥을 할 때, 돌이나 창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좋아하던 그 습성으로 인해, 요즘도 조그만 골프 공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골프를 좋아한다는 설입니다. 사실 역사적 이유야 어떻든 그 작은 공이 온갖 장애물을 넘어 쭉쭉 날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일종의 스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잠재한 ‘초월’에의 희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는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합니다.


저보고 왜 골프를 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이상에서 말한 이유 외에 제 나름대로의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골프의 윤리적·철학적·종교적 측면 때문이라고 한다면 너무 거창해서 기절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요란을 떨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뭐 그 비슷한 이유라 할 수는 있습니다.


상대방을 방해하지 말라


우선 골프는 자기가 이기기 위해서 상대방을 방해하거나 해쳐야만 되도록 된 경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스포츠는 내 쪽에서 상대방을 불리하게 해야만 득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장 신사적이라는 테니스마저도 상대방에게 공을 불리하게 줌으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는 경기입니다. 그 외에 탁구, 축구, 농구, 권투, 하키, 당구 등 모두 상대방을 불리하게 하는 것이 경기 운영의 필수 요건입니다.


물론 이런 유형에 속하지 않은 운동도 있기는 합니다. 수영, 볼링, 역기, 체조, 육상, 활쏘기, 사격, 투창 등 적다가 보니 생각보다는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만, 구기 종목으로는 고작 골프와 볼링 정도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골프와 볼링은 자기 스스로 훈련해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방을 방해해야 하는 경기라고 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거기에 대하는 태도가 문제라 여겨집니다. 테니스의 경우를 예로 들면, 상대방이 받기 곤란한 공을 주어야 할 때 그것이 오로지 내가 이겨서 상대방보다 높아지고 존경받고 우쭐해지기 위한 목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훈련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또 자기가 받기 어려운 공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먀말로 내가 어려움을 대처해 나가는 데 필요한 능력과 정신력을 배양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다면, 그 경기 자체가 하나도 나쁠 것이 없고, 오히려 결과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보기에 따라 서로서로 하나의 살아가는 연습, 훈련이 되는 것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아무튼 골프는 선의의 목적에서든 무슨 목적에서든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골탕먹이는 일에 개입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점이 우선 마음에 들었습니다.


인생을 배운다


거의 모든 스포츠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특히 골프를 통해서 인생의 여러 측면을 배울 수 있다고 하는 점이 다음 가는 이유입니다. 어느 사람이 말하듯, 골프는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골프 치듯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있는 많은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보통 두 사람, 세 사람, 혹은 네 사람이 한 그룹이 되어 9홀이나 18홀을 도는데, 네 사람이 가장 흔한 경우입니다. 깃발이 꽂힌 홀을 향해 한 사람씩 공을 칩니다. 한 사람이 공을 Tee에 올려놓고 정신을 집중하여 치려고 할 때, 다른 세 사람은 그 사람의 정신을 산만하게 할 일체의 행동이나 말을 삼가고 조용히 뒤에서 지켜볼 뿐입니다. 자기의 그림자마저도 공치는 사람의 정신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을까 조심합니다.


공을 잘 쳤으면 “Nice Shot!” 라든가 그 비슷한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다 칠 때까지 먼저 친 사람도 마찬가지로 조용히 기다려 줍니다. 네 사람 다 쳤으면 저마다 자기 공이 날아간 곳을 향해 갑니다. 제일 짧게 간 공이 있는 선까지만 일단 가서, 그 공의 주인이 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두 그 선 뒤에서 기다려 줍니다. 이렇게 홀에서 먼 사람의 순서대로 홀을 향해 공을 쳐갑니다.


치다가 어느 누가 잘못 쳐서 공이 숲 속으로 들어갔을 경우에는 다른 세 사람도 모두 같이 가서 공을 찾는 데 협력합니다. 공을 찾았으면 다시 모두 자기 위치로 돌아가서 계속 멀리 있는 사람의 순서로 공을 칩니다. 치다가 골프채로 잔디를 긁어냈으면, 반드시 긁혀 나간 잔디 조각을 주워다가 다시 채우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 줍니다. 한 홀이 끝났으면 잔디 위에서 우물쭈물하면서 스코어를 적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팀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빨리 자리를 비켜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빨리 치는 사람들이라면 먼저 지나도록 양보하여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R형, 이처럼 골프는 상대방이나 딴 사람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또 적극적으로 딴 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모든 면에서 최대의 관심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하도록 된 경기입니다. 골프장에서 익힌 이런 태도와 예의를 인생의 게임에다 적용한다면, 우리의 대인 관계가 어떻게 바뀌겠습니까?


이제 다음 홀 티 오프 hole tee off 에 가서 스코어를 적습니다. 모두 각자가 자기 점수를 스스로 계산해서 기록하는 사람에게 보고합니다. 이 때야말로 정직과 신뢰를 함양하는 시간입니다. 자기 스코어에 대해 스스로 정직해야 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정직성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상대방이 분명히 다섯 번 친 것 같은데, 그 사람이 네 번 쳤다고 하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실수로 잘 못 계산한 경우가 확실하다면 일깨워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하나하나 따지면서 우길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로 게임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사실 얼마든지 유리한 점수를 딸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골프 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남이 안 보는 데서 슬쩍 공을 움직여 위치를 바꾼다든지 헛친 스윙을 연습으로 간주한다든지, 숲으로 들어간 상대방의 공을 밟아버린다든지, 골프 경기 전체를 통해서 거짓으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골프를 그런 식으로 친다면 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골프는 절대 정직을 스스로 행사하는 경기이고,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도 거짓에 대한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경기이기도 합니다.


다음 티에서 한 사람씩 또 치는데, 최근에는 준비된 사람이 먼저 칠 수 있도록 되었다고 합니다만, 전에는 지난번 홀에서 제일 잘 쳤던 사람이 제일 먼저 치도록 돼 있습니다. 그 다음엔 다음으로 잘 친 사람 순서입니다. 이것은 잘 쳤던 사람에게 영예를 돌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바람의 방향과 세기, 지형 등등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조건에서 딴 사람들을 위해 먼저 쳐봐주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일종의 정찰 비행을 시켜서 어떻게 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약자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자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골프를 통해 약자를 돕는 마음을 키우는 셈입니다.


어느 한 사람의 공이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은 골프채로 땅을 탕탕 쳐대면서 ‘제기랄’ 등 욕을 마구 합니다. 어떤 사람은 벙커에 공이 들어가면, ‘저 망할 놈의 벙커’ 하면서 욕을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욕을 해서 우리의 성질을 더욱 거칠게 할 것이 아니라, 옆에 찬물이라도 있으면 한 모금 마시고, 거기에서 무엇인가 배우는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살이가 이처럼 자기 마음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물도 건너고 산도 넘고 숲도 지나고 골짜기도 빠져나가야 하는 인생길에서, 언제나, 순풍에 돛 단 듯 평탄하게만 갈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인생의 기복을 따라서 살아가노라면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골프는 실패를 당했을 때 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가짐을 키우는 운동입니다.


사물을 여러 관점에서 보는 연습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꼭 파를 해보겠다고 했다가 공이 빗나가는 바람에 두 번을 더 쳐서 더불 보기를 하였을 경우, 그렇게 저주만 할 것이 아니라 ‘골프는 치기 위해 하는 것, 많이 칠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라든가, ‘골프는 걷기 위해 하는 것, 점수 같은 데 너무 신경쓰지 말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이리저리 실컷 걷자’ 하는 식으로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봄으로써 꽁하고 사는 마음을 벗어버리는 일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 점수가 시원치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배짱 때문에 그걸 그렇게 서글프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골프 칠 때 점수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급급해 하는 것은 골프를 전적으로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대개 골프장은 경치가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푸른 잔디, 넓은 호수, 맑은 하늘, 멀리 있는 산 등 아름다운 경치를 의식하고 즐기며 골프를 치라는 것입니다. 프로들처럼 한 두 점으로 몇십만불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한 두 점으로 너무 희희낙락하거나 좌절과 실의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 일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소위 수양에 도움이 되도록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음미하며 골프 코스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 각 개인의 경험과 사정에 따라 이런 저런 면에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교훈을 많이 배울 수 있을 줄 압니다만 이 문제는 여기서 일단 그치고 골프의 더 깊은 차원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봅시다.


골프도(道)


R 형, 골프에 있어서 저에게 특히 매력적인 것은 골프의 정신적, 종교적 측면입니다. 혹시 골프가 ‘구속 사업’의 연습이라고 한다면 ‘웃긴다’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좀 더 들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속인지 구원인지,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형도 아시다시피, ‘죄’를 희랍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합니다. 어원적으로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과녁을 맞추도록 노력하는 것은 죄를 없애기 위한 노력인 셈입니다. 과녁을 다시 맞추면 죄를 진 상태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골프는 활쏘기와 마찬가지로 과녁을 향해 집중하는 운동입니다. 따라서 골프가 죄에서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구속 사업’의 연습이라는 말도 과히 과장된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근본적 의미의 죄란 것은 사실, 요즘 많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지닌 소외된 상태를 뜻합니다. 인간이 자기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겉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료 인간들로부터도, 자기의 참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나간 상태에 있는데, 이렇게 떨어져 나간 상태가 소위 ‘죄’라는 것입니다. 죄의 시초를 설명해 주는 ‘실락원’의 이야기도 이렇게 근원 혹은 ‘중심(center)’에서 떨어져 나와 변두리에 맴돌게 된 우리의 실존적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향성’입니다. 따라서 구원 혹은 ‘복락원’이란 이렇게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다시 하나로 합하는 것입니다.


미국 ‘나바호(Navaho)’ 인디언들이 모래 위에 우주의 모형을 그려 놓고, 그 중심으로 되돌아감을 실현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그 중심에 들어가 앉는다든가, 인도나 티베트 사람들이 만다라(曼陀羅, mandala)를 통해 중심으로 돌아감을 실현하려고 온갖 종교적 정열을 쏟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두 같은 종교적 태도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골프는 이렇게 과녁으로 가는 것, 중심으로 가는 것, 떨어졌던 상태에서 하나로 되는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장 잘 상징하는 운동인 것 같습니다. 골프처럼 가장 먼 데서 가장 작은 과녁을 향해 가는 데 온갖 고초와 역경을 극복하고 나가는 것을 연습하는 것은 우리의 죄진 상태, 소외된 상태가 아무리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거기에서 헤어나 해방된 상태로 나가야 한다는 우리의 결의를 재확인하고 공고히 하는 하나의 종교 의식이 될 수 있다고 보아도 과히 틀림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골프가 그대로 종교 의식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은 이외에도 또 있습니다. 깨끗이 씻은 정갈한 공을 tee 위에 정중히 얹어 놓고, 거기를 향해 엄숙하게 다가서는 것, 올바른 자세를 정하고 준비 운동으로 한 두 번 흔들어 보는 것, 모두 하나의 경건한 예식이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매번 공을 깨끗이 씻고 티 오프를 하는 것, 공을 깨끗이 씻었다고 얼마나 더 잘 나가겠습니까만, 이것은 모든 일에 정성을 다 한다는, 제사 지낼 때의 진지함과 성실함,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골프의 정신적, 종교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을 향해 서서 치려고 할 때, 정신을 통일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종교에서 그렇게도 중요시하는 영혼의 훈련입니다. 하나의 요가입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공을 치는 순간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는 몰아의 순간입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참자아’, ‘본마음’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입니다. 껍데기로서의 나,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죽고, 내면의 ‘나’, 진정한 의미의 속사람이 살아나서 움직이게 되는 순간입니다.


공을 치려는 순간, 이번에는 한 번 멋지게 쳐 봐야겠다든가, 상대방이 깜짝 놀랄 정도로 솜씨를 보여 주어야겠다든가, 이번만은 기어코 버디 아니면 파를 해야겠다든가, 이런 저런 욕심에서 나오는 ‘잡생각’을 가지면 공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공을 향해 서는 순간에는 일체의 헛된 욕심, 망상, 쓸데 없는 기대, 자랑하려는 마음 등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서 나오는 잡념을 비우고,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연습, 자기를 비우는 연습, 자기에게 죽는 연습, 자기를 부정하는 연습, 도(道)와 하나가 되는 연습입니다.


동양의 스포츠에는 검술과 검도, 궁술과 궁도, 봉술과 봉도 등 ‘술(術)’과 ‘도(道)’를 구별합니다. 술은 요령과 지략과 테크닉(기, 技)으로 하는 것이고, 도(道)는 이런 지적이고 계산적인 것을 초월해서 도(道)와 하나가 된 경지에서 나오는 자발적이고 신비스런 어떤 힘에 따라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중국 고전 장자(莊子)에 옛날 중국 문혜(文惠) 왕의 요리사가 칼로 소의 각을 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이 요리사는 얼마나 절묘한 솜씨로 칼을 쓰는지 칼에서 바람소리가 나는 듯 하고 손발, 어깨, 허리, 모두가 척척 맞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노랫가락에 맞추어 춤추듯 장단이 딱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왕이 “거 참 훌륭하도다. 그대의 기술이 흠잡을 데가 없도다.”라고 칭찬하자 그 요리사는 칼을 옆에다 놓으며 “제가 목표하고 따르는 것은 모든 기술을 초월하는 도(道)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으려고 할 때는 눈앞에 소 한 마리가 온통 그대로 보였습니다. 3 년이 지나니 소가 더 이상 통째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소를 잡을 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神)으로 합니다. 감각이나 지각을 중지시키고 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소 잡는 비법을 쭉 이야기합니다. 왕은 “훌륭하도다. 오늘 내가 요리사의 말을 듣고 양생을 배웠도다.”가고 감탄했습니다. (장자, 제3장).


여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神)으로 한다”든가 “감각이나 지각을 중지시키고 신(神)이 원하는 대로 따른다”라고 했는데, 이 ‘신(神)’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神)이라면 초월적인 마음, 정신, 성령, 그 비슷한 것일 텐데, 요즘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 혹은 뇌의 우반구에서 나오는 힘이랄까, 내 속에 있는 제 3의 기능이랄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쨋든 나의 일상적 의식과는 구별되는 무엇입니다. 우리가 일상 쓰는 말에도 무엇이든지 기가 막히게 잘하면, ‘신통하게 한다’거나 ‘신바람 나게 한다’고 하는 것이 여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자기를 잊어버리고 ‘신(神)’이 나서 하는 경지가 ‘도(道)’를 따라서 하는 것, 도통(道通)했다는 경지인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안씨라고 하는 태권도 사범 한 분을 만났습니다. 십 수년 간 태권도를 했지만 몇 년 전에야 비로소 태권도의 신비를 터득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도 힘들이는 일 없이 자기도 모를 어떤 힘에 따라 그저 춤추듯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뿐이지만 상대방의 공격을 빈틈없이 막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태권술에서 참 의미의 태권도의 경지로 들어온 셈입니다.


골프의 기본 요건은 과도한 힘이나 완력을 쓴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을 많이 줬다고 공이 멀리 나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편안한 자세에서 전체적으로 리듬과 타밍이 맞고 유연하게, 다시 말해서 자연과 합일되는 무아의 경지에서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피는 이런 경지를 내면적인 힘으로 치는 것, ‘참된 중력(true gravity)’을 체득하고 거기에 맞춰서 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공과 골프채와 치는 사람의 몸과 정신이 모두 혼연 일체가 되어 아주 자연스럽게 골프를 치는 것입니다. ‘헤리겔’은 활쏘기에 있어서 활과 활 쏘는 사람과 과녁이 하나가 된 경지에서 쏘는 것은 내가 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쏘는 것이라 했습니다. 골프나 활쏘기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치든지, 바이올린을 켜든지,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잊어버리고, 무아가 된 상태에서 나의 참 근원, 진정한 나와 하나됨을 체험하는 신비스런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모두 그대로 도(道)를 닦는 것입니다. 수도(修道)입니다. 경건한 예배(禮拜)입니다.


R 형, 푸른 초원에 ‘신(神)’을 뵈러 나간다면 벼락맞을 소리일까요? 영국의 그 유명한 서머힐(Summerhill)의 창설자 ‘니일’(A. S. Neil)는, 새 시대의 새 종교는 “일요일 아침을 수영하는데 보내는 것이 교회에서, 마치 하느님이 찬송가 소리를 들어야만 흐믓해 하시기나 하는 것처럼, 찬송가를 부르면서 보내는 것보다 더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종교는 “신을 하늘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초원 위에서도 찾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R 형, 건방진 소리같이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요일 새벽에 골프 치러 나갈 때 저는 ‘신(神)’을 찾으러, 마음 닦으러, 마음 비우러, 도닦으러 가는 심정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러 가는 기분으로 그렇게 나갑니다.


종교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도(道)가 들어와서 자기를 움직여 가도록 하는 경지를 터득하는 것, 굳었던 마음을 아름답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흐렸던 마음을 맑고 향기로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는 것, 이것이 중요한 대목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이런 것을 골프장에서 배우고 연습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오늘도 골프채를 흔들어 봅니다.


R 형, 언제 한 번 같이 나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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