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배달하던 14년 무명가수, 트로트로 대박 난 사연

조회수 2021. 04. 19. 06: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팔색조 매력 트로트 다능인 영탁

다능인(多能人). 뭐든 잘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 대척점에 한 우물 유형이 있다. 일찌감치 한 분야에 매진해 그 분야 전문가가 되는 사람들. 한 우물형은 진로에 대한 고민이 적은 반면, 다능인은 고민과 방황이 길 수밖에 없다. 아이디어도 많고, 습득력도 빠른 데다 적응력까지 뛰어나기 때문에 뭘 해도 다 ‘이 길이 내 길인가’ 싶어 진짜 내 길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을 요한다.


영탁(본명 박영탁)은 다능인이다. 한 우물형의 재능이 크리스털처럼 투명해 예측 가능하다면, 다능인은 겹겹의 재능을 지녀서 알면 알수록 신비감을 안긴다. 다능인의 레벨을 굳이 상중하로 나눈다면, 영탁의 레벨은 특상 정도가 되지 않을까. 3옥타브를 넘나드는 깔끔한 고음을 자랑하는 실력파 가수로서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연기면 연기, 게다가 미술 실력까지 갖췄다. 작사·작곡 능력에 스타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내는 프로듀서로서의 안목도 뛰어나다.


노래는 또 어떤가. 트로트, 발라드, 재즈, R&B, 랩, 뮤지컬 등 무슨 장르든 제 노래처럼 넘나든다. 감성의 진폭도 넓다. 흥이 많아 밝은 에너지의 ‘열정탁’ 이미지가 강하지만, 발라드 감성에도 착 스며들어 가슴을 후벼 파는 애절함을 안긴다. 가장 놀라운 건 목소리의 변주다. 트로트를 부를 땐 굵은 진성을 많이 쓰지만, 발라드를 부를 땐 섬세한 가성을 낸다. 노래 스타일에 따라 음색이 워낙 달라서 ‘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영탁은 방황이 길었다. 마니아 사이에서는 일찌감치 ‘재야의 고수’로 인정받았지만 결정적 한 방이 부족했다. 다 잘했지만 특히 잘하는 걸 찾기까지 오래 걸렸다. 2005년 〈가문의 영광〉 OST에 참여하면서 데뷔한 그는 ‘지방아이돌 소울’ ‘박지(Park G)’ 등 그룹으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노래를 선보였지만 뜰 만하면 가라앉곤 했다. 무명의 세월이 14년에 달한다.


그 한 방이 바로 트로트에서 터졌다. 데뷔 11년 만에 ‘누나가 딱이야’로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며 무대의 맛을 알아갔고, 팬들과의 소통법을 알게 됐다. 재야의 고수에서 무대 위 가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다방면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실력의 임계치는 〈미스터트롯〉에서 폭발력을 발휘했다. 특히 경연 무대 2라운드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시청자와 마스터들의 마음을 훔쳤고, 결승전에선 작곡가 미션 곡 ‘찐이야’로 훨훨 날았다. 결국 〈미스터트롯〉 진(眞) 임영웅에 이어 선(善)에 올랐다. 기존에 없던 다능인 트로트 스타의 탄생이었다.


영탁은 어떤 스타와도 캐릭터가 겹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가 소화해내는 영역의 스펙트럼이 늘 기대치를 넘어선다. 알아갈수록 하나둘 파헤쳐지는 겹겹의 매력에 일단 그의 팬이 되고 나면 팬심이 더 공고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탁의 팬덤은 ‘내 스타부심’이 누구보다 강력하다.

3월 중순, 올해의 팬톤 컬러인 노란색 의상을 준비해 온 영탁과의 커버 촬영과 인터뷰 현장. 그는 또 하나의 숨은 재능을 드러냈다. 모델로서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임해 예정된 일정을 앞당겼다.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음악 템포에 따라 거침없이 표정 연기를 선보이는가 하면, 신곡 ‘이불’을 연속 재생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인터뷰 시간에는 진지하게, 조용히 임하고 싶다며 일행을 밖으로 물렸다.


‘이불’을 들으며 자주 눈을 지그시 감더군요.

이 노래 탄생 뒷얘기가 궁금합니다.


“팬송으로 만든 노래예요. 온전히 제 마음을 담아 팬분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평소 ‘내 사람이다’라는 말을 많이 써요. ‘당신은 내 사람이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가져다 쓰시오’라는 말을 주변 분들이나 사랑을 주신 팬들에게 많이 해왔어요. 말하자면 내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사용권이라고 할까요. 팬들을 내 사람으로 표현하면서 노래 첫 소절에 녹였죠. ‘도닥도닥 내 사람아~’라고. 노래를 준비하고 부르면서 제가 더 많이 울었어요.”


평소 잘 울지 않기로 정평이 나 있던데요.


“작년 한 해 동안 정말 많이 울었어요. 감사와 감동의 눈물이죠. 팬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거든요. 이런저런 이벤트를 받을 때마다 ‘와, 뭐지?’ 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적인 순간이 많았어요. 데뷔 15주년 기념 이벤트 때도 그랬고, 한 팬이 그려서 보내주신 웹툰을 보고도 그랬어요. 제가 걸어온 길을 당시의 머리스타일, 안경 모양까지 그대로 반영해서 그려주셨는데, 마지막은 팬들이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나무를 향해서 제가 걸어가는 장면이에요. 이제는 혼자 걷지 말라고, 우리와 함께 걷자는 메시지죠. 와, 그거 보면서 엄청 울었어요. 꺼억꺼억 눈물이 계속 쏟아졌어요.”


어떤 감정이었을까요?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 번에 올라온 것 같아요. 잘 견뎌온 시간들이 저 스스로 기특하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해도 해도 안 되니까 포기 아닌 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었죠.”


가장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2012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 직후였어요.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 무대에 서기만 하면 뜰 줄 알았거든요. 꿈의 무대에 섰는데도 바뀌지 않더라고요. 이제 진짜 가수를 안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러면서 카페 서빙, 택배 배달 같은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습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그 와중에도 좋아하는 노래는 계속했어요. 제가 가이드를 해주면 그 가수가 잘됐거든요. 이 가수 저 가수 모창도 많이 했어요. 두루두루 할 줄 아는 건 많은데, 결정적인 딱 하나가 없었죠.”


다재다능한 팔색조 매력이 트레이드마크가 됐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죠. 진짜 나에게 맞는 걸 찾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성공한 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요. 한 우물 유형과 다능인 유형.

영탁 씨는 후자 쪽입니다. 재능이 많아 이것저것을 두루 해오다 보니 그것들이 융합돼서 폭발력을 발휘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죠.


“그 말을 들으니 제가 평소 해온 ‘가지치기’들이 떠올라요. 음악이라는 뿌리 안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벌여왔거든요. 가수, 작곡가, 가이드 요원, 코러스 요원, 프로듀서, 보컬 트레이너, 강사…. 장르도 발라드, R&B, 힙합, 재즈, 뮤지컬 등 다양했죠. 그땐 방황 같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제 실력을 쌓는 데 하나하나가 다 도움이 됐어요. 후배와 제자들에게도 그런 말을 해요. ‘네가 중심을 가지고 다양한 걸 시도하다 보면 할 게 많더라. 하나의 맥락을 지키면서 부딪쳐봐라’ 하고요. 그런데 결국은 하나로 모아져요. 음악이요. 저를 살게 하는 건 음악이에요.”

그 팔색조 같은 모습에 “이것도 잘해?” 하면서 “왜 이제야 알아봤을까” 하는 반응이 많아요.


“맞아요. 그런 게 하나씩 오픈될 때마다 재미를 느껴요. 이번 방송에서는 저런 면이 나올 텐데 팬들이 얼마나 좋아해주실까, 그런 걸 보는 재미.”


팬덤이 워낙 강력한데요. 실감이 납니까.


“그래서 겁이 났어요. 왜냐하면 팬들이 늘 떠났거든요. 한때 싸이월드 일간 방문자 수가 2만 명에 달했고, 〈스타킹〉 우승 후에는 팬카페에 1만 명 가까운 분들이 계셨지만 결국 다 떠났어요. 그런데 지금은 팬분들이 이런 제 마음까지 다 아십니다. 저더러 이제는 겁먹지 말라고 해요.”


그때의 팬과 지금의 팬은 결이 다른가요?


“다르죠. 당시에는 저 스스로 발라드 가수로서 얼마나 갈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활동 도중에 계속 브레이크가 걸렸죠. 몇 달 활동하다가 잠잠해지고, 앨범도 안 나오니까 팬들이 떠날 수밖에요. 하지만 지금은 계속 활동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팬들과 꾸준히 소통할 수 있어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제는 팬들이 떠날까 봐 두렵지 않은 상황이 된 거죠. 든든한 뿌리가 생긴 것 같아요.”


팬들이 지어준 별명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요.


“박폭스요. 처음에는 싫었어요. 여우 하면 일단 여시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잖아요. 그런데 팬들이 붙여준 이 별명에는 다양한 뜻이 있어요. 사람을 홀린다는 뜻도 있고, 변신의 귀재라는 뜻도 있죠.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기 좀 민망한데, 저더러 사람을 홀린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매력이 있다가 저런 매력이 있다가, 또 아이 같았다가 오빠 같았다가 또 어떤 때는 아저씨 같다고요. ‘박폭스’가 제가 걸어온 길, 제 매력을 잘 표현한 말 같아서 지금은 맘에 들어요.”


무명의 시간이 길었어요.

없던 것을 갖게 되면 그동안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욕심이 생길 법도 한데 여전히 배려의 아이콘입니다.


“없었기 때문에 욕심이 더 안 생겨요.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인데, 누군가 욕심을 내려 하면 제가 그럽니다. ‘에이, 원래 없던 거잖아. 왜 욕심 내? 그러지 마.’ 제 노래인 줄 알았던 노래들을 누군가에게 준 게 100곡 가까이 돼요. 그렇다 보니 내 곡이 하나라도 생기면 감사한 거예요. 그런데 안 생겨도 ‘원래 내가 주인이 아닌 거지’ 하고 살게 돼요. 또 활동하면서 〈스타킹〉 우승도 해봤고, 〈히든싱어〉 휘성 편에서 주목을 끌면서 나름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아봤는데 금방 꺼지더라고요. 뭐라도 활동할 기회가 있다는 자체가 되게 감사해요.”


촬영하면서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입에 뱄더군요.


“현장에 가면 기본적으로 스태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깔려 있어요. 원래 없던 사람들이잖아요. 제겐 없던 스태프이고, 스타일리스트고, 로드매니저예요.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로 이동하고, 음반이 나오면 직접 들고 심의 받으러 다녔어요. 그러니 이 모든 게 그저 감사하죠.”


촬영장에서는 오래전부터 톱스타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당하던데요.


“그건 좀 다른 문제예요. 스태프나 주변 분들을 대할 때는 인간 영탁이로 돌아오고, 카메라 앞에서만 바뀌는 거예요. 왜냐, 이만큼 나이를 먹고 활동했는데 저기서 쭈뼛대면 저에게는 다음이 없는 거예요. 내일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모든 촬영시간을 단축시키려 합니다. 제가 잠깐 뻘쭘한 걸 참으면 모든 스태프가 빨리 퇴근할 수 있잖아요.”

다소 늦은 30대 후반에 스타가 됐어요.

한때 잘나가던 분들은 활동이 뜸해지는 나이인데요.

희비쌍곡선이 엇갈리면서 무명 때부터 알았던 분들이 어떤 말을 해주시던가요.


“‘이렇게 될 줄 알았어’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고 ‘영탁이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라는 말씀도 많이 해주세요. 저는 잘 살아왔고,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잘 산다는 게 뭔가요.


“‘사람이 기본이다’라는 생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삶. 좋은 사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어요. 욕먹을 짓 안 하고, 예의 바르고, 감사를 표현할 줄 알고, 사랑을 표현할 줄 알고, 건방지지 않고, 동생들한테 베푸는 사람이요. 〈뽕숭아학당〉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후배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친구의 노래를 불러주기도 해요. 깜짝 이벤트처럼 ‘방송 봐라’ 했다가 나중에 그 친구가 전화 와서 고맙다며 엉엉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확실히 조명을 받는 정도가 다르거든요. 제가 그 맘을 알잖아요. 무명 시간이 길었으니.”


실력이 있다고 다 스타가 되는 건 아닌데요, 어떤 사람이 스타가 될 자질을 갖췄다고 생각해요?


“첫째는 무조건 사람이에요. 노래 잘하는 사람은 쌔고 쌨거든요. 일단 인성이 좋아야 하고, 나중에 터질 게 있으면 안 돼요. 평소 사고 안 치고 잘 살아야죠. 둘째는 팬들과의 소통 능력이에요. 과거의 스타와 지금의 스타는 달라요. 원래 저는 관종 처럼 보일까 봐 SNS 같은 걸 잘 안 했어요. 그런데 팬들이 원하고 보고 싶어 하시니까 자주 하려 해요. 스케줄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것도 그래서예요.”


영탁의 인생을 펼쳐놓으면 인생의 궤도가 달라지는 두 번의 결정적 순간이 보인다. 첫 번째는 청주대 광고홍보학과 2학년을 마치고 가수가 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순간. 두 번째는 10년 넘게 해오던 발라드 장르를 벗어나 과감히 트로트를 시도한 순간. 그 두 번의 과감성과 행동력이 지금의 영탁을 있게 했다. 머물러 있기는 쉬워도,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궁금합니다.


“집안 분위기가 엄격한 편이에요. 엄마는 공무원,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큰외삼촌은 중령까지 하셨고, 막내삼촌은 30년간 경찰로 지내셨어요. 노래를 좋아했지만 가수가 되겠다고 나서기는 어려운 분위기였죠. 저도 원래 ROTC를 하려다 육군3사관학교 입교를 앞두고 있었어요. 면접과 체력테스트까지 마친 상태였죠. 입교 직전에 용돈벌이차 영남가요제에 출전했는데 대상을 받았어요. 새로운 길이 보였죠. 성장 과정에서 보고 자란 군대의 조직문화가 답답하게 느껴졌고, 정해진 틀대로 사는 게 싫었거든요. 입교를 연기하고 가수가 되겠다고 무작정 상경했어요. 상금 100만 원 중 친구들한테 한턱내고 남은 돈 50~60만 원 가지고요. 월 34만 원짜리 원룸텔을 구해 홍대 앞 연예인들이 많이 가는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시작했어요. 노래 연습은 바로 앞에 있는 수노래방에서 하고요.”


그때부터 맨땅에 헤딩하듯 바닥에서 다져왔지요.

힘든 상황에서도 후배들을 챙기는 행보가 인상적이었어요.


“내 노래가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히든싱어〉에서 우승한 친구들이 노래를 갖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그 친구들을 데뷔시켜주고 싶었어요. 〈히든싱어〉의 임창정·환희·휘성 편 우승자를 제 노래로 데뷔시켰죠. 〈미스터트롯〉 이대원·승민·정동원·나태주에게도 곡을 줬고요. 제 이름을 걸고 노래하면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커요.”


트로트를 시도한 계기는요.


“트로트 휘성으로 불리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와 소통하다 보니 트로트 시장이 마이너 세계인 줄 알았는데 다채롭게 세분화돼 있는 게 보였어요. 공략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트로트에 도전했어요. 곡을 쓰다가 지금의 소속사 대표님을 알게 됐고, ‘누나가 딱이야’를 만났어요. 처음 이 곡은 가사도 없었어요. ‘딱이야’ 콘셉트만 있었는데, 즉석에서 ‘빠바밤 딱이야~ 빠바밤 딱이야~’ 하면서 불렀더니 대표님 눈이 커지시더라고요. 이후 또 3년간 고생이 시작됐지만요(웃음).”


숨은 고수로 불릴 정도로 실력을 갖췄음에도 무명의 시간이 길었어요.

신세 한탄은 안 했나요?


“부모님이 그러셨어요. 아직 부족하다고. 커뮤니티에서는 나름 유명해서 으쓱하기도 했지만, 부모님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마다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트로트 시작하고 2년쯤 지나서, 그러니까 2~3년 전이죠. 그때가 돼서야 ‘아, 이제 무대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대를 알 것 같다는 느낌이라.


“발라드를 부를 때는 신곡 발표하고 2~3개월 활동하면 무대가 없어요. 행사도 거의 없었고요. 그렇다 보니 무대 매너나 현장 감각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트로트를 하면서 다양한 무대에 서게 됐어요. 전국팔도의 KBS, MBC 방송국 다 다니고, 노래교실과 일본 여행 크루즈 선에서도 무대에 섰어요. 그러면서 소통법과 무대 매너를 알아갔죠. ‘이렇게 하면 박수가 더 나오네?’ ‘컨디션 안 좋을 땐 음 처리를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무대의 맛이요.”


발라드를 오래 하다가 트로트로 전향했는데, 발라드에 대한 아쉬움은 없어요?


“전혀요.”


스스로 진짜 좋아하는 장르는 뭐예요?


“저는 좋아하는 장르 구분이 딱히 없어요. 이것저것 다 해봤잖아요.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보컬로서 임팩트 있게 대중에게 전달된 장르가 트로트니까 트로트에 대한 애정이 강하죠.”


후배들에게 평소 “자기 음악을 하라”는 말을 많이 하시죠. ‘자기 음악’이란 뭔가요.


“무대에서 자신이 가장 어필이 잘되는 음악이에요. 저는 트로트를 하면서 발견했어요. 관중석의 환호가 맥스로 터질 때, 그 순간의 의미와 나를 잘 분석해야 돼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찐이야’가 가장 크게 터진 곡들이고, 그 기분을 처음 맛본 건 ‘누나가 딱이야’ 때였어요. 환호가 터질 때마다 ‘아, 이 톤이구나, 이 발성이구나’ 하는 걸 캐치해서 그 느낌을 잘 가져가야 돼요.”


좋아하는 것보다 잘하는 걸 자기 음악으로 받아들이는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겹치면 가장 좋죠. 처음엔 좋아하는 걸 좇아봤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잘하는 걸 좇아봤어요. 잘하다 보니 좋아졌고요. 결국엔 두 가지가 잘 버무려진 쌍쌍바 같은 느낌(웃음)?”

아버지와 막걸리 얘기를 해볼게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오랫동안 투병하셨지요. 요즘엔 좀 어떠세요?


“하루에 두 번씩은 꼭 전화를 드리는데요, 요즘엔 많이 좋아지셔서 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주시기도 해요.”


다행이에요.

‘효자 가수’로 칭찬이 자자합니다.


“30대 들어서 인생 처음으로 청약통장을 만들었어요. 노래 부르고 강의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았죠. 그 돈이 아버지 병원비에 보탬이 돼서 너무 감사했어요. 그거 없었으면 캄캄했을 거예요. 통장을 해지해서 다 보태도 모자라서 지인분들에게 부탁했는데, 감사하게도 다들 한 번에 척척 빌려주셨어요. 생기는 대로 금방 갚았고요.”


다소 아까운 마음은 없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모았는데.


“어휴,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를 위한 건데. 천만다행이었죠. 돈이 그렇게 쓰이는 자체가 되게 감사했어요. 어머니와도 그런 얘길 했어요. ‘이러려고 안 쓰고 모아뒀나 봐요’라고.”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막걸리 한잔한 게 언제였어요?


“예전엔 아버지와 함께 막걸리를 진짜 많이 마셨어요. 아버지가 편찮아지면서 영영 못 마시겠구나 했는데, 작년에 한잔했어요. 많이 좋아지셔서 의사선생님께 허락받고 딱 한잔했죠. 영탁막걸리. 와, 너무 감동이었어요. 아버지도 저도. ‘아들이랑 한잔하니 좋네’ 하시는데 울컥하더라고요. 한마디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먼 훗날, 어떤 가수로 기억되길 바라요?


“음… (한동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쟤 보면 참 좋아. 영탁이 좋지, 영탁이 좋아’ 이런 말을 들으면 그걸로 족해요. 음악이든, 사람이든. 음악은 이 길로 계속 걸어가면 좋을 것 같고요. 앞으로도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죠.”


무대 뒤 조연으로서 스타에게 곡을 주던 그는, 이제 특급 주연이 되어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가 다져온 영탁이라는 음악 왕국은 쉽사리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이 아니다. 드넓은 대지에 기초를 탄탄히 다지고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쌓아온 축적된 결과물의 합이다. 이 왕국은 거센 파도에도, 힘찬 바람에도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렀다.


그의 지금을 있게 한 가장 큰 힘은 사람이다. 그가 인터뷰 중 가장 많이 한 말은 ‘좋은 사람’이었다. 무명 시절에도, 톱스타가 된 지금도 그는 특유의 긍정성을 잃지 않으며 ‘좋은 사람’이 가지는 힘을 믿고 있다. 잘나가다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스타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력과 인성이라는 두 지층을 겹겹이 다져온 영탁이라는 음악 왕국의 영속성을 믿는다.


글 톱클래스 김민희

사진 톱클래스 서경리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