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엔지니어들 - 단테 자코사 (2)

조회수 2021. 04. 19. 17: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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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이상적 소형차 만들기에 헌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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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탄생한 피아트 500 '토폴리노'는 뛰어난 설계로 단테 자코사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그러나 대중차로서 제 역할을 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수요가 없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엄청난 인플레 때문에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1950년대가 시작될 무렵 생각할 수 있었던 대중적 탈것은 스쿠터 정도에 머물렀다. 원래 토폴리노의 개발 목표였던 '저렴하고 실용적인 가족용 차'는 여전히 피아트와 자코사가 이뤄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다.

마침 유럽 경제는 마셜 플랜(미국의 유럽 경제 원조 프로그램)에 힘입어 되살아나고 있었고, 대중차 수요도 함께 커지고 있었다.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폭스바겐 타입 원 '비틀'과 르노 4CV 등이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피아트에도 그런 차가 필요했고, 1950년에 피아트의 엔지니어링 책임자가 된 자코사는 다시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맞았다.

출처: Stallantis
피아트 600

3년여의 세월에 걸쳐 개발한 끝에, 1955년에 피아트는 전후 첫 대중형 소형차인 600을 선보였다. 당대 피아트 차들은 모두 앞 엔진 뒷바퀴굴림 방식 구동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자코사는 경영진을 설득해 600의 구동계를 뒤 엔진 뒷바퀴굴림 방식으로 만들었다. 비틀과 4CV의 사례를 참고해 작은 크기에 실내 공간을 키우기 좋은 형태를 고른 것이다. 

출처: Stellantis
피아트 600 물티플라

덕분에 600은 3m가 조금 넘는 길이의 차체에 어른 네 명이 탈 수 있었다. 아울러 뒤 엔진 뒷바퀴굴림 구동계 배치 덕분에, 차체 뒤쪽 구조를 그대로 활용한 원박스 형태의 변형 모델 600 물티플라도 어렵지 않게 개발할 수 있었다. 값은 아주 싼 편은 아니었지만, 신용 할부 제도의 도입으로 판매는 피아트의 기대를 뛰어넘으며 전후 재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출처: Stellantis
피아트 500 '누오바 친퀘첸토'

600의 성공이 점잖은 수준이었다면, 뒤이어 1957년에 나온 신형 500 즉 누오바 친퀘첸토는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20여 년간 생산된 토폴리노의 후계 모델로서, 500은 작고 단순한 차체에 네 명이 탈 수 있었다. 기본 아이디어는 독일 피아트의 젊은 직원의 제안에서 시작되었지만, 개발 과정에서 자코사는 생산 비용과 효율을 고려해 '쓸만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누오바 친퀘첸토의 공랭식 2기통 0.5L 엔진은 출력이 13마력에 불과했지만 작고 가벼운 차체 덕분에 제법 빨리 달릴 수 있었다. 판 스프링에 댐퍼를 절묘하게 구성한 앞 서스펜션과 반 독립식 뒤 서스펜션의 조합은 차를 다루는 재미를 더했다. 철강재 공급의 어려움 때문에 지붕을 직물 캔버스 톱으로 만든 것은 현실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아이디어였다. 주행 특성뿐 아니라 생김새도 중세 시대부터 이어진 좁고 구불구불한 옛길로 가득한 이탈리아의 도심과 잘 어울렸다.

출처: Stellantis
피아트 500 '누오바 친퀘첸토'

누오바 친퀘첸토의 설계 책임자로서, 자코사는 1959년에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산업디자인 상인 '황금 컴패스 상(Premio Compasso d'oro)'을 받았다. 이 상을 받은 자동차 업계 인물은 그가 처음이었다. 


누오바 친퀘첸토는 금세 이탈리아 경제형 소형차의 상징이 되었고, 600을 뛰어넘는 인기를 얻으며 또 하나의 피아트 글로벌 모델로 자리를 잡았다. 누오바 친퀘첸토는 여러 차례 개선되고 왜건인 자르디니에라(Giardiniera), 패널 밴인 푸르곤치노(Purgoncino) 등 다양한 변형 모델이 만들어지며 1957년부터 1975년 생산 중단 때까지 약 389만 대가 팔렸다.

그러나 자코사에게 500은 완전히 만족스러운 차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1979년에 내놓은 자서전 '피아트에서의 설계 40년(I miei 40 anni di progettazione alla Fiat)'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959년에 나온 모리스 미니의 모습은 우리 모두를 맥빠지게 했다. 그렇게 작고 성공적인 설계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1947년에 설계한 100 이후로 가로배치 엔진 앞바퀴굴림 차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지 않았던 것이 아쉽고 후회스럽다."

물론 그는 후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계 철학과 개념을 꾸준히 발전시켰고, 피아트는 물론 세계 자동차 업계에 큰 영향을 준 모델을 잇달아 내놓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적 가로배치 엔진 앞바퀴굴림 구동계의 틀을 잡은 것도 그였다. 첫 시도는 1964년에 첫선을 보인 아우토비앙키 프리물라(Autobianchi Primula)였다. 이 차를 통해 자코사는 피아트 계열 양산차로는 처음으로 엔진 끝에 변속기를 달고 비대칭 드라이브샤프트로 앞바퀴를 굴리는 구성과 랙 앤 피니언 방식 스티어링 구조를 선보였다.

출처: Stellantis
피아트 128

이 구조는 한층 더 숙성되어 1969년에 등장한 피아트 128에 쓰였다. 피아트 128은 이와 같은 구동계에 맥퍼슨 스트럿 앞 독립 서스펜션을 조합한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다양한 크기의 소형차에 효율적 공간 구성을 가능하게 만든 이 구조는 곧 '자코사 배치(Giacosa arrangement)'라 불리며 다른 업체들이 앞다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알렉 이시고니스가 미니를 통해 실용화한 가로배치 엔진 구성의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어, 자코사는 자신의 과제를 해결한 것은 물론 현대적 소형차 설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셈이다.

128은 자코사가 피아트에서 마지막으로 설계에 관여한 모델이기도 했다. 1970년 1월에 피아트의 고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현역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코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은퇴할 때까지 피아트 승용차 프로젝트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모든 모델의 개발을 지휘했다. 소형차인 500에서 대형 세단인 2300, 스포츠카인 8V와 피아트 디노, 오프로더인 캄파뇰라(Campagnola)에서 가스터빈 콘셉트카인 투르비나(Turbina)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도 넓었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완성된 피아트 124와 128은 유럽 올해의 차(COTY)에 올랐다.

출처: Stellantis
단테 자코사

자코사는 은퇴 이후에도 피아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기술적 조언을 아끼지 않고, 1991년에는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신형 친퀘첸토(2007년에 나온 500과는 다른, 각진 형태의 3도어 해치백) 공개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 새 모델 출시를 축하하기도 했다.

피아트와 더불어 자동차 역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자코사는 1996년 3월 31일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피아트 최고 경영자였던 파올로 칸타렐라는 "자코사는 지금의 피아트를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칸타렐라의 말은 '500의 아버지'로서 널리 알려진 자코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영향력을 보여주는 가장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글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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