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세대가 구찌를 입는 방법

조회수 2021. 04. 26. 16:3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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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패션 트렌드에 대해 글을 쓰는 객원 에디터 이예은이다. ‘샤넬, 디올, 아르마니, 톰포드, 입생로랑’ 지금 나열한 브랜드의 공통점은 럭셔리 패션 브랜드인 동시에 향수, 뷰티 라인으로도 유명하다는 점이다.


1920년대, 샤넬이나 랑방 같은 디자이너 브랜드는 새로운 소비자를 유입하기 위해 향수 및 뷰티 라인을 런칭했다.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몇백만 원짜리 오뜨꾸뛰르 의상은 너무 비싸도, 같은 디자이너의 철학과 미감을 담은 향수는 범접할 만한 가격이니까. 요즘도 그렇지 않나. 동네 옷 가게에서는 디올 옷을 팔진 않지만 올리브영에서 디올 향수를 파는 것처럼. 이렇듯 패션 브랜드가 향수 라인을 런칭한 계기는 젊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고 브랜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작년 상반기 소비 트렌드 중 하나였던 ‘스몰 럭셔리’에 대한 수요가 100년 전에도 유효했다는 뜻이다.


20세기의 럭셔리 브랜드가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선택한 게 향수라면, 2021년엔 그 방법이 사뭇 다르다. 게임 속 아바타가 입는 캐릭터 스킨을 만드는 것이다.

[발렌티노X동물의 숲ⓒValentino]

코로나19로 밀라노 컬렉션에서 패션쇼를 열 수 없게 되자, 발렌티노는 작년 5월 <동물의 숲>을 통해 새 컬렉션 의상을 공개했다. 발렌티노의 2020 S/S 프리폴 컬렉션을 캐릭터 스킨으로 제작해 선보인 것이다. 발렌티노뿐만 아니다. 마크제이콥스 또한 <동물의 숲>을 위해 6가지 옷을 제작해서 배포했다. 그렇게 <동물의 숲> 유저들은 스킨을 무료로 다운받고 자신의 아바타가 발렌티노, 마크제이콥스 신상 컬렉션을 입은 채 섬을 활보하도록 했다.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스 제스키에르는 2016년에 <파이널 판타지13>의 캐릭터를 루이비통 캠페인 모델로 쓴 적이 있는 게임 덕후다. 게임 덕후답게 루이비통은 2019년, 2020년에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화려한 디자인의 캐릭터 스킨을 선보이며 유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했다.

[리그오브레전드 가상 아이돌 그룹 트루데미지의 세나, 키아나가 입은 루이비통 LOL 캡슐 컬렉션]

유저들은 자신의 게임 캐릭터가 루이비통을 입은 채 맵을 활보하는 걸 세상 뿌듯해했다. 그리고 루이비통 옷을 입고 있는 캐릭터 티셔츠가 포함된 한정판 LOL 캡슐 컬렉션은 런칭한 지 1시간 만에 완판됐다.

패션 브랜드와 게임 산업의 만남, 이에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건 구찌다. 이미 구찌는 작년 6월 <테니스 클래시>라는 게임 속 캐릭터를 위해 구찌의 모자, 옷, 양말, 신발을 디자인했고, 올해 1월에는 노스페이스와 협업해 세계 여러 도시의 팝업스토어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는 구찌X노스페이스 상품 스킨을 만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서울은 포함되지 않았다.

올해 2월, 구찌는 가상 현실 플랫폼 제페토를 통해 2021 S/S 컬렉션을 구현한 60여 종의 의상, 신발, 가방, 액세서리 아이템 스킨을 공개했다. 구찌가 만든 건 옷에 그치지 않았다. 가상공간 속의 구찌 빌라를 만들고 그 안에서 옷을 구경하고, 아바타가 피팅까지 해볼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실제 구찌 매장과 유사한 공간을 구현한 거다.

제페토X구찌 아이템 가격은 게임 속 화폐인 젬으로 지불하는데 현실 화폐로 따지면 아이템 당 1,000원에서 4,000원 정도의 가격이다. 실제 구찌 옷에 비하면 1000분의 1 정도 하는 가격. 이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옷도 예쁘고 정교하게 잘 만들어서 나를 닮은 아바타에 이것저것 입히는 재미가 쏠쏠하더라. 대부분의 유저가 10대라 내 주변엔 같이 하는 친구가 없어서 조금 외롭다는 점만 빼면.


젬으로 구찌 옷을 구매하고, 그 옷을 입고 커뮤니티에서 친구를 만나고, 구찌가 만든 세상을 탐험한다. 아바타를 통한 가상 체험은 언택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세계였다. 제페토를 이용하는 유저의 평균 접속 시간이 156분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그런 수치가 가능한지 이해가 갈 정도다.

소비자 입장에서 패션 브랜드가 제작한 게임 스킨을 입는다는 것은 향수처럼, 아니 향수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럭셔리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준다. 또한 브랜드 입장에서는 실제 판매하는 제품과 똑같은 게임 스킨을 가상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노출하면서 제품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또 브랜드 인지도와 친근감을 높이고, 젊은 세대를 새로운 고객으로 끌어들이고 젊은 브랜드로서의 이미지를 재고하는 데도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지금까지 패션 브랜드에서 제공하는 스킨은 대부분 무료였지만 구찌X제페토 같은 유료 스킨의 경우에는 수익을 낼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일방적인 마케팅이 아닌, 소비자와 브랜드가 유기적으로 교감하는 Z세대가 사랑하는 체험형 마케팅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를 단순한 패션 마케팅 전략으로만 보면 안 된다. 이미 트렌드로 부상한 메타버스(생활형, 게임형 가상세계)에서의 아바타 산업의 영향력과 발전 가능성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는 움직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패션 브랜드가 중단기적 수익 창출을 위해 게임과 콜라보레이션을 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을 가진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한 셈이란 뜻이다.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그룹 에스파의 4명의 멤버와 그들과 자아를 공유하는 아바타 넷]

“에스파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 작년 11월에 SM엔터테인먼트가 6년 만에 선보인 걸그룹 에스파의 데뷔곡 ‘블랙맘바’에 나오는 가사다. 무슨 뜻인고 하니 에스파 네 멤버 개인이 각각 AI로 만들어진 아바타를 갖고 있고 각각은 둘이 아닌 하나의 존재기 때문에 자신과 아바타를 떼어낼 수 없다는 뜻을 담은 가사다. 난해하다. ‘엑소 데뷔 초 멤버들이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게 얼마 안된거 같은데 여기는 또 이러네…’하며 놀랄 수 있다.


그러나 이수만 SM 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세계문화포럼에서 이 컨셉을 설명하며 “미래엔 한 사람당 각자 인격권을 가진 여러 명의 AI 브레인 아바타를 소유하게 될 것이고, 아바타들끼리 소통하고 관계를 가지는 아바타들의 초거대 버추얼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전 세계 2억명 유저를 가지고 있는 가상 현실 기반 플랫폼 제페토]

그 형태가 AI로 변했다 뿐이지 태초에 옷 입히기 게임, 아바타스타 슈, 싸이월드 미니룸 꾸미기가 있었다. 내가 처음엔 낯설어 어쩔 줄 모르던 제페토 구찌 빌라에서 처음 만난 10대들과 열심히 아바타 숨바꼭질 놀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다. 아주 재밌었다. 과거와의 차별점이라면 그 캐릭터가 나의 아바타로서, 나를 굉장히 닮았다는 점이다. 눈 크기, 쌍꺼풀 유무, 눈 사이 간격, 입술 모양, 콧볼 크기 등 디테일하게 조절할 수 있고 심지어는 카메라로 내 얼굴을 스캔해 자동으로 나와 가장 닮은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를 닮은 나 혹은 또 다른 나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아바타로 만들 수 있다.


여전히 낯선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아바타를 통해 소통하는 것은 Z세대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다.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앱을 이용해 친구와 가족들과 연락하는 것처럼 이미 국내 10대들에게는 제페토 안에서 아바타끼리 셀카를 찍고, 대화하고, 좋아하는 연예인 아바타의 팬사인회에 가고, 친구의 아바타와 가상 공간을 함께 가서 노는 문화가 퍼져있다.

[3억 5천만명 이상의 유저를 가진 인기 비디오 게임이자 미국 z세대에게 SNS형태로 사용되고 있는 포트나이트]

3억 5천만명이 넘는 유저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인기 게임 <포트나이트>는 단순한 게임 이상으로 아바타를 통해 소통하는 단단하고 다양한 커뮤니티를 형성되어 넷플릭스를 위협하는 여가 활동으로 평가 받는다. 이 게임의 주 이용자 층인 10대들은 현실에서 친구와 만나지 않아도 가상 공간에서 아바타끼리 만나 영화를 보고 공연에 가는 등 일상과 게임의 경계가 크게 구분 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아바타를 치장하기 위한 패션 아이템 스킨을 구매하기 위해 포트나이트 유저들은 한 달에 20달러에 가까운 금액을 쓴다는 조사가 있다. 마치 자신은 블루클럽에서 만 원짜리 커트를 하면서 반려동물에겐 20만 원짜리 강아지 헤어 컷을 하는 내 지인처럼 말이다. 아바타를 치장하는데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게 메타버스 속 생활이 일상화된 Z세대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미 Z세대들에겐 아바타로 경험하는 메타버스가 게임과 SNS, 여가활동, 쇼핑 공간이 결합된 형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는 아바타가 가상 현실 속 패션 스킨이 모여있는 백화점에 가서 옷을 입어보고 쇼핑을 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런 미래에서는 친구의 아바타와 만나 대화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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