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오히려 원동력..잃을 게 없었다" 美사막 뒤흔든 한국 DJ

조회수 2021. 5. 8. 08: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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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화점XSIDE PROJECT] 2019버닝맨 '마얀 워리어' 오른 DJ슈보스타

미국 네바다 주 ‘블랙록시티’라 불리는 사막에는 매년 일주일 동안 도시가 생긴다. 일주일 내내 음악이 울려퍼지고 인터랙티브 예술작품이 곳곳에 설치된다. 언뜻 사진만 보면 페스티벌 같지만 버닝맨은 단순한 페스티벌이 아니다.

출처: Burning Man

세계적 아티스트들이 모이지만 공연 순서표도 존재하지 않고, 나무로 만든 구조물은 마지막에 불로 태워진다. 인터넷도 안 터지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커피와 얼음 뿐이다. 사막에서 일주일 동안 생존하기 위한 모든 것을 스스로 챙겨가고 자기가 만든 쓰레기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전부 도로 가져가야 한다. 


버닝맨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놓고 수 만 명이 단체로 실험에 참여하는 창의적 공동체에 가깝다(2020, 2021 버닝맨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온라인으로 개최되었다). DJ 슈보스타(이하 슈보)는 2019년 버닝맨 ‘마얀 워리어’에서 음악을 튼 최초의 한국인 DJ다. 

버닝맨에는 영화 ‘매드맥스’에 나올 것 같은 아트카(Art Car)들이 수 백 대씩 돌아다니는데, 그 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DJ들이 음악을 튼다. ‘움직이는 클럽’인 셈이다. 멀리서도 번쩍이는 레이저를 보고 ‘저기가 마얀 워리어구나’ 하고 찾아갈 수 있다. 버너(버닝맨 참가자)들은 사막에서 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물어물어 마얀 워리어를 찾아간다.


수 백 대의 아트카 중에서도 가장 명성 높은 마얀 워리어에서 디제잉한 최초의 한국인. 기대감을 안고 처음 만난 슈보는 정 많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우주와 닮은 음악을 틀고,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좋아하고 ‘스페이스 오디세이'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를 보고 ‘아티스트 슈보’의 팬이 되었다. 친한 친구가 된 지금은, 사람으로서 슈보의 팬이 되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DJ, 슈보스타

전공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전공이 뭐였죠?


화학이랑 철학이요. 고등학생 때 향수를 모으는 게 취미였어요. 고등학교에서는 컴퓨터 게임을 전공했는데, 향수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고등학교에서 컴퓨터 게임 전공이요?


중학교 때 제가 너무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TV를 보고 ‘대안 학교’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학생들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대안 학교를 마음에 품고 있다가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의 입시생 모집 전단지를 보게 됐고, 이곳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제가 그때 컴퓨터를 좋아했거든요.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4개의 과가 있었어요. 만화과, 애니메이션과, 영상 연출과, 컴퓨터 게임과. 그림도 좋아하긴 했지만 저는 컴퓨터 게임에 잘 맞을 것 같아서 책을 사서 혼자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거예요.


근데 또 계속 앉아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게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우리 과에 컴퓨터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요. 컴퓨터 게임에도 음악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영상 연출과 선생님을 쫓아다니면서 프로그램을 배우고, 피아노와 기타 소리를 컴퓨터로 찍어서 음악을 만들면 친구들이 그 음악을 게임에 넣었어요.

고등학생 시절의 슈보

슈보는 폭넓은 취향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도전하는 사람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중학교 때는 교회 밴드에서 기타를 쳤다. 어머니로부터 통기타를 배웠다. 


첫사랑 상대가 향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조향사가 되겠다’ 다짐하고 화학과를 목표로 삼았다. 게임제작대회에서 장관상을 받고 대학 화학과에 입학했지만 막상 공부해 보니 철학이 더 적성에 맞았다고. 화학 D학점을 복수전공 철학 A학점으로 메꾸어 졸업했다.


화학, 철학을 전공한 게 지금 일에도 도움이 되나요?


네. 제가 대학을 안 갔다면 지금 갖고 있는 관념들이 안 만들어졌을 것 같아요.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저에게는 또 다른 풀이었어요. 해외에서 공부하고 오거나 해외 대학원에 진학할 친구들도 있고. 화학 공부를 할 때는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철학은 제가 그 친구들보다 잘하는 거예요. '내가 이 친구들이랑 다를 바가 없구나.’ 배경이 달라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게 자존감을 높이는데도 도움이 됐고요.


화학은 디제잉할 때 도움되는 건 없지만 사는데 도움이 돼요. 예를 들면 제가 천문학, 물리학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보면, 화학을 공부했던 경험이 있으니 어려운 내용이 나와도 파고들면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좋아하는 걸 파고들고, 덕질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거예요. 철학은, 인생의 그릇을 넓히는 데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들어도 삶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에요.

태국에서 디제잉하고 지내던 시절의 슈보

그런데 어쩌다가 조향사가 아니라 DJ를 하게 된 거예요?


원래 진짜 꿈이 컸어요. 프로방스에 있는 록시땅 본사에서 일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록시땅 홍보대사도 하고, 불어도 배우고. 꿈이 확실했다기보다는, 어떤 걸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냥 해봤어요. 뭔가를 계속하면서 사는 걸 좋아했어요.


뭐 하나에 빠지면 제대로 빠지는 스타일인가 봐요.


당시 22살쯤 만나던 친구가 기타를 쳤거든요. 근데 헤어진 뒤로는 또 치기가 싫더라고요. 5시간씩 치던 걸 1시간도 안 치게 되고. 학교로 복귀한 날 운명처럼 학교 입구에서 DJ 동아리 모집 포스터를 발견했어요. 


학교로 복귀하면서 새롭게 정착할 뭔가 필요해서, DJ 동아리에 들어가서 친구들이랑 매주 클럽에 다니고 디제잉을 배웠어요. 친구에게서 배운 뒤로는 대학로의 한 공간에서 견습 DJ로 아르바이트하면서 음악을 꾸준히 틀었고요. 이런저런 파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더 큰 클럽에서 틀 수 있는 기회들이 열리고, 그 후로 계속 디제잉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럼 조향사의 꿈은 어떻게 됐어요?


하하. 조용히 사라졌죠. 바람처럼. 그 꿈을 버렸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요. 조향사의 꿈을 버리고 디제잉을 택했다. 이게 아니라 앞을 보고 가다가 어라? 하고 제 눈길을 끄는 곳으로 계속 걸어간 느낌이에요.

"저는 잃을 게 없었어요"

나에게 오는 길을 막지 않아서 재밌는 일들이 생긴 것 같아요. 해외로도 많이 나갔잖아요. 제일 처음에 나가게 된 곳은 어디예요?


2010년부터 디제잉을 했는데요, 태국에서 투어를 3~4번 정도 하고 태국에서 2년 동안 살았어요. 태국에 투어를 가면 현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저에게 태국에 오면 방 하나를 마련해준다는 제안을 받은 거예요. 태국은 밥도 더 싸고. 큰 고민하지 않고 가겠다고 결정하고 바로 나갔어요.


그런데 태국에서 산지 2년 정도 됐을 때 대인기피증이 생겼어요. 디제잉도, 사는 것도 즐겁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른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고 싶은 직업도 없고. 반년 정도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사람들도 안 만나고요. 그러다가 영어 모임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대인 기피증이 나아졌어요.


다시 0에서 시작하는 기분으로 어떤 일을 해볼까 고민하고, 찾아봤어요. 공고를 찾아보면 직업은 안 보이고 해외 도시만 보이는 거예요. 뉴욕에서 일하는 공고. 파리에서 일하는 공고. 무엇이든 좋으니 다시 나가고 싶더라고요.

해외 취업을 목표로 다양한 곳에 지원을 했어요. 그러다가 멕시코 칸쿤에 있는 스튜디오에 스냅사진 작가로 지원했는데, 제가 포토샵을 잘 다룰 줄 아니까 사진 경력이 없어도 저를 뽑아줬어요. 칸쿤에 신혼여행 온 사람들을 사진 찍어주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1년 있다가 칸쿤으로 옮겼어요.


칸쿤에서 스냅샷 작가로 활동하던 때까지만 해도 DJ를 계속할 생각이 아니었던 거죠?


네. 오히려 사진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멕시코 시티에서 DJ 친구가 칸쿤에 놀러 왔는데 제 인스타그램을 보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혹시 DJ냐고 물어보면서 자기가 멕시코 시티에서 파티 만들면 와서 틀어볼래? 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한다고 했죠.


제가 평소에 듣던 음악, 좋아하는 음악들을 안고 떨리는 마음으로 갔는데요.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제가 음악을 튼 날, 난리가 났어요. “얘 도대체 뭐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왜 멕시코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 와서는 이해가 가요. 제가 트는 음악이 멕시코 취향이었던 거죠. 


미호(Mijo)라는 DJ 친구가 있는데요, 멕시코 시티에 엠엔로이(M.N Roy)라는 유명한 클럽이 있어요. 미호의 소개로 그 클럽에서 틀게 됐는데 처음 튼 날 4~5시간을 틀었는데 또 대박이 난 거예요. 그래서 한 두 달에 한 번 레지던트 DJ로 활동하게 되고, 제가 잘 튼다는 소문을 듣고 엠엔로이 사장님이 절 보러 왔어요. 


처음 만난 날 사장님이 저를 안아주면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음악 너무 잘 들었다고. 그 사장님이 마얀 워리어의 음악 디렉터예요. 사장님의 추천으로 버닝맨 마얀 워리어에서 틀게 된 거예요.(웃음)

인생의 길을 바꿀 만한 큰 결정도 쉽게 내리는 것처럼 느껴져요. 걱정된 적은 없어요?


저는 항상 잃을 게 없었어요. 한국에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방세 20만 원 내면서 바퀴벌레와 개미가 함께 나오는 집에서도 살고 그랬으니까요. 저는 제가 가난하다고 인식도 못했거든요. 돈이 없었던 게 뭐랄까, 저에게는 원동력이었어요.


그런 결정을 내릴 때 기준이 있어요?


딱 하나였던 것 같아요.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 저를 설레게 만드는 일이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잘 안 들려요. 누가 뭐라고 하면, 상대도 기분 안 좋고, 나도 기분 안 좋고. 서로 감정만 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차피 저는 제 할 일을 할 거거든요.


가볍게 생각하고 던지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고려해서 단단한 결정을 내리면, 저는 그냥 그 결정에 닿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줘요.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잖아요. 자기 인생인데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결정했겠어요.

마음 가는 대로 뭐든지 좋아하며 살기

“언어가 너무 재밌어요. 연애가 다른 세계를 가장 빠르게 만나는 거라면, 언어를 배우는 건 연애보다 더 큰 세계가 열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더라고요. 영어에 이어 스페인어도 열리고 나니까 언어 공부에 거의 중독됐어요. 계속 파고들게 돼요.”

이야기를 전부 듣고 보니 정말 흐르는 대로 살았네요. 눈 앞에 재밌는 길이 보이면 놓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칸쿤에 가게 된 경로가 대인 기피증 때문이잖아요. 인생에 바닥을 친 시기거든요. 그런데 바닥을 치자마자 바로 이렇게 올라온 거예요. 여길 오기 위해서 바닥을 찍었구나 생각했어요.


디제잉 10년 하면서 최근 3년 빼고 앞선 7년 동안 했던 고민이 있어요. ‘왜 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런데 또 딱히 좋아하는 게 없지?’ 주변 DJ들 보면 ‘외길 테크노' 이런 말처럼, 하나의 장르를 파고드는 사람들이 멋있는 거예요. 


‘왜 나는 없을까' 고민하면서 그냥 살았어요. 제가 끌리는 대로 조금씩 조금씩 하다 보니까 이 시간이 쌓여서 지금은 누가 봐도 색깔이 짙은 사람이 됐잖아요. 지금 저는 무슨 음악을 틀어도 사람들이 “이거는 슈보 색깔"이라고 말하거든요.

그래서 사소한 것들이라도 제한을 두지 말고 열심히, 마음껏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왜 내 색깔이 없지' 이러고 아무것도 안 하지 말고, 열심히 살면서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카테고리화 된 색이 아니라 ‘나만의 색'을 창출해내는 때가 올 거예요.


인터뷰를 하면서 슈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다양한 세계에 푹 빠져보고 탐험해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컴퓨터 게임, 피아노, 기타, 사진, 언어, 디제잉. 세상이 나에게 보여주는 길을 거부하지 않고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 슈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길은 이 질문에 관한 하나의 좋은 레퍼런스가 된다. [글=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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