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까지 살아보니 "000 공부는 계속하면 좋더라"

조회수 2022. 1. 6. 18:06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현재의 삶에 갇혀 더는 생각이 자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용기를 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 축적된 책을 읽거나 새로운 걸 시도하고 배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든 감성적으로 대책 없이 골라잡든 일단 뭐라도 읽고 배운다.

공부라는 우주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들이 어쩌다 공부를 하려고 마음은 먹어도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막연히 뭔가 공부하고 싶다거나, 여유가 생겼을 때 그냥 놀기는 싫은 사람들도 쉽게 시작하고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공부는 없을까? 바쁜 시간을 쪼갠 우리에게 생산적인 성과를 남길 수 있는 공부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외국어 공부를 추천하고 싶다. 유학 갈 필요가 없거나 해외 관련 업무를 하고 있지 않아서 외국어를 배워야 할 목표나 명분이 없는 사람에게도 외국어 공부처럼 좋은 게 없다.


일단 외국어 공부는 다른 공부를 하면서도 할 수 있고, 자신의 생활방식에 맞춰 충분히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공부다. 무엇보다 누구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인생 중후반기에 들어 공부를 한다고 하면 “그 나이에 그런 걸 배워서 뭐해?”라는 말을 듣기 일쑤인데, 외국어 공부를 한다고 하면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사람들이 계획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감정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여유가 된다면 해외로 떠나서 새로 배운 외국어를 사용해본다거나(지금의 시국에서는 힘든 일일 수 있겠지만), 자격시험에 응시해 성취감을 얻기도 쉬운 공부다.

또한 엉성하게 공부해도 써먹을 수 있고, 잘하지 못해도 크게 흉이 되지 않는 것이 외국어다. 영어 공부로 익히 경험한 바, 오래도록 아마추어 단계에 머물러도 덜 부끄러운 건 외국어밖에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계속 공부해야 할 당위성을 부여해준다는 억지스러운 생각도 해본다.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를 몇 달 배운 것만으로 날렵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리하자면 외국어 공부는 해야 할 이유를 참 쉽게 찾을 수 있는 공부다.

나의 경우, 언어를 모르는 나라에 가기 싫었다. 여행을 가는 모든 나라의 언어를 완전히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내가 머무는 나라의 상점 간판을 읽고 편하게 교통편을 이용할 정도는 알고 싶었다(물론 관광지에서는 현지인들과 대화는 못 해도 손가락과 지갑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관광객이 드나들지 않는 동남아 지역의 작은 도시에서는 현지인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영어회화조차 통하지 않을 때가 있어, 쇼핑을 하기에 불편할 때가 많다. 2018년 가을에 5주간 머물렀던 베트남의 호찌민이 그랬다.

나이 든 현지인이 운영하는 노점에 가면 물건값을 치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주인장이 영어로 알려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신이 받을 만큼의 금액에 맞는 화폐를 단위별로 여러 장 꺼내서 보여주기도 했다. 그마저도 제대로 안 돼서 답답하면 내가 종류별로 화폐를 몇 장 내밀고 맞는 금액만큼 집어가게 했다.

여행을 가면 이곳저곳 바삐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한 장소에서 최대한 오래 눌러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관광지에 온 여행자가 되기보다는 며칠을 살아도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그곳에 눌러 사는 생활자처럼 지내고 싶다. 그러니 여행 때문에라도 언어를 공부해야 하지 않겠는가. 평소에는 튼튼한 체력을 자랑하다가도 여행지에서는 저용량 배터리의 소유자가 되는 내겐, 여행지의 언어와 문자를 익히는 일이 여행성공의 관건이다.


내가 찾아낸 나의 마들렌은 ‘외국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하는 ‘시간의 층위’에는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이 있다.

들뢰즈는 그의 책 《프루스트와 기호들Proust et les signes》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그 유명한 홍차와 마들렌 에피소드를 ‘되찾은 시간’으로 분석했다. 마들렌의 맛에서 고모네 집이 있던 콩브레에서의 기억을 살려내는 주인공의 모습은 수없이 많은 책에서 인용한 바 있으니, 이 에피소드를 접했던 기억은 쉽게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잃어버리는 시간’의 과정을 통과해서 이미 ‘잃어버린 시간’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되찾는 시간’을 거쳐‘되찾은 시간’이 전개되는 사건을 만들어보고 싶지 않은가.

들뢰즈는 마들렌에 자극을 받은 ‘비자발적 기억력’이 만들어 내는 공명의 효과가 ‘지고지순한 행복감’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나중에 우리가 살아갈 시간들 중 ‘지고지순한 행복감’으로 등장할 우리의 마들렌을 여기저기 숨겨두면 어떨까.

내가 찾아낸 나의 마들렌은 ‘외국어’다.

질 들뢰즈의 이 말이 모두에게 울림이 되기를.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