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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는 왜 '절규'를 그렸을까?

조회수 2020. 5. 25.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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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가 절규를 그린 이유?

“삶에 대한 두려움은 필요하다. 불안과 질병이 없는 나는 방향키 없는 배다. 내 고난은 내 자신과 예술의 일부. 그들을 나와 구분할 수 없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나의 예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고통들을 간직하고 싶다.”

에드바르 뭉크

불안과 고독을 그리는 예술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선과 폭발하는 듯한 색감.
에드바르 뭉크는 특유의 어두운 화풍으로 자신만의 예술관을 정립하며 세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인정받았는데요.

80년의 인생동안 2만 여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낸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절규>죠.

휘청이는 대자연과 불안한 사람의 얼굴.
그리고 그 둘을 분리해주는 듯한 불안정한 난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나 절규 속 사람의 표정은 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내며 뭉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기도 했는데요.

그렇다면 뭉크는 왜 절규를 그렸을까요?
뭉크는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뭉크를 하면 <절규>를 떠올리곤 하지만 뭉크는 80년 생애동안 2만5천여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죠.

전생애에 걸쳐 그림을 그린 만큼 뭉크의 작품은 계속해서 변해왔습니다.
하지만 뭉크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죠.

바로 고독과 불안.
뭉크는 사람, 사물, 자연을 화폭 속에 담았는데요.

이따금 밝은 느낌의 작품들을 만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어둡고, 거친 또 휘청거리는 화풍의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절규> 뭉크 작품의 정수라 평가받습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불안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불리죠.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은 정확히 말하면 <절규>가 아닙니다.

뭉크가 처음 이 작품과 함께 공개한 메모엔 <자연의 절규>라는 제목이 붙어있죠.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단순히 사람의 절규가 아닌 자연 전체를 아우르는 절규를 담아낸 작품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은 노르웨이에 위치한 ‘오슬로 피오르’입니다.

피오르는 노르웨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이 지형의 명칭으로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길고 좁은 만을 뜻하죠.
노르웨이 오슬로에 위치한 피오르는 뭉크 작품의 주요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데요.

덕분에 <절규>가 아닌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사실 여러 작품의 연작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건 이 작품이지만 스케치부터 유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연작으로 제작되었죠.

작품은 다른 예술가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불안감과 고독함의 감정을 완전하게 담아내며 세기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뭉크의 어린 시절 또한 불안과 고독의 연속이었습니다.

뭉크는 스웨덴 노르웨이 사이 로이텐 지방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는데요.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의 이별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뭉크가 5살 때 어머니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13살이 되었을 때는 두살 위 누이를 페병으로 떠나보내야 했죠.

여동생 중 하나는 우울증으로 인한 착란 증세로 정신병원에 보내졌는데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죽음을 지켜본 뭉크는 생애 내내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때문에 그의 작품 속엔 죽음의 공포로부터 나타난 불안감이 내재돼 있습니다.
뭉크는 항상 자신이 질병과 광기에 둘러싸여있다 생각했죠.
뭉크는 80 평생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그에 삶 속에도 연인과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뭉크의 우울과 불안은 자신의 사랑을 망치곤 했죠.
처음 사랑에 빠졌던 사람은 후원자의 부인이었는데요.

자유분방했던 그녀와 달리 뭉크는 그녀를 끝없이 의심하고 질투했습니다.
이 사랑은 잘 이어지지 않았고 결국 뭉크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죠.
후에는 고향 후배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다른 예술가와 함께 삼각관계를 유지하다가 뭉크를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뭉크는 이 여인을 모델로 <마돈나>라는 작품을 완성했는데요.
마돈나로 여겼던 여인이 메두사로 변해버렸다는 생각이 반영된 작품입니다.
뭉크가 34세가 되었을 때 세번째 사랑이 찾아오는데요.
상류층 여성이었던 튤라였죠.

둘은 행복한 연애관계를 유지했으나, 결혼을 원했던 튤라의 요구를 뭉크는 매몰차게 거절해버리죠.

이전의 사랑에서 회복되지 못한 뭉크는 자아가 닫히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사랑과 연대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1889년 뭉크는 노르웨이의 동료 화가들과 함께 파리 엑스포로 떠납니다.

엑스포에서 노르웨이 작가들과 모여 작은 전시를 열기도 했죠.
하지만 정박 뭉크는 이 작업을 지루해했다고 합니다.
반면 뭉크는 파리 엑스포에서 유럽 각국의 회화들을 접하게 되는데요.
특히나 3명의 현대 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감을 받습니다.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렉이었죠.
특히나 그중에서도 폴 고갱의 작품에 깊게 매료됩니다.
폴 고갱의 작품을 보며 “사실주의에 반하는 가장 완벽한 반응”이라 평했는데요.

뭉크는 예술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단순히 자연의 외적인 모습을 똑같이 모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자신만의 감상대로 자연의 색과 형태를 변형해 표현하는 고갱의 자유로운 화풍에 깊게 빠졌죠.

때문에 이 시기 이후의 뭉크 작품에선 뭉크가 고갱의 색감과 형태를 연구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1889년 12월, 뭉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뭉크의 가족은 더욱더 궁핍해졌죠.

그는 집으로 돌아와 돈많은 콜렉터로부터 대출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정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성년이 된 이후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은 뭉크에게 많은 상실감을 가져다줬습니다.
그의 우울함은 커져갔고 이는 결국 삶의 의지마저 꺾게 하죠.

이 시기 뭉크는 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반대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죠.
이후에도 뭉크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자신만의 화풍을 고민하며 새로운 미학적 고민을 담아낸 “멜랑콜리”라는 작품을 선보이는데요.
유럽의 여러 현대 예술을 접한 뭉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작품 속에 담으려 헀죠.

당시 노르웨이 예술 기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뭉크가 노르웨이 최초의 상징주의 예술가가 됐다 평가합니다.
상징주의는 사물의 보이는 모습을 넘어선 숨겨진 진실을 담아내는 화풍인데요.

인간 내면의 감정이나 감각, 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죠.

이 화풍은 1880년대 후반 유럽 사회에 유행했는데요.
평단은 뭉크의 작품도 그런 상징주의의 방향성을 가졌다 본 것이죠.

이러한 이야기는 유럽의 평단 사이 퍼져나갔습니다.
하루는 베를린 평단으로부터의 초대를 받고 전시를 펼치는데요.
노르웨이와 달리 베를린의 평단 사이에선 비평과 논란이 일었습니다.

표현을 최소화하고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모습이 혼재된 모습은 기존의 화풍들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죠.

뭉크는 하지만 오히려 이런 평단의 반응을 즐겼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화두가 되는 것을 즐기면서 또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켜나갔죠.
1893년 뭉크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집약한 걸작을 만들어냅니다.

<절규>

흔들리는 대자연과 그 안에서 절규하는 인간.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된 모습 속 표현되는 강한 감정의 묘사는 관객들을 모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뭉크는 절규를 그리던 당시 심정을 글로 기록했는데요.
그 글에는 이렇게 묘사돼 있습니다.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불현듯 우울함이 엄습했다.
하늘이 갑자기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피로감에 멈춰 난간에 기댔다.
검푸른 협만에 마치 화염 같은 핏빛 구름이 걸려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혼자서 불안에 떨며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뭉크는 자연을 거닐며 자신의 시각에만 들어온 감정을 화폭 속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불안과 절규
그리고 고독함.

뭉크가 자연으로부터 느꼈던 아주 개인적인 감정은 반대로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누구나 만연하게 갖고 있는 불안감.

작품은 가장 현대인들의 개인적인 영역을 파고들며 세기를 대표하는 명작이 되었죠.
뭉크는 80세 고령의 나이가 될 때까지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80년동안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을 합치면 무려 2만 5천점이 넘을 정도로 다작한 예술가이기도 하죠.

1944년 1월 23일 뭉크는 길었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뭉크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전 작품과 유품을 모두 오슬로 시에 기증했습니다.
덕분에 지금도 오슬로를 찾아가면 뭉크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죠.
“내 썩어가는 몸에서는 꽃이 자라고
나는 그 속에 있을 것이고, 그것이 곧 영원이다.”

자신의 고뇌와 고통을 녹여내 세계에서 가장 공감받는 불멸의 명작이 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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